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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리핀, 한국 선교사들의 천국인가?지정학적 위치와 국가와 기독교 정보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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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0.16  14:4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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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리핀, 한국 선교사들의 천국인가? 

지난 10월 10일-14일 필리핀을 방문하였다. 선교지, 선교사, 사역을 바라보는 2번째 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 개인들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그럴 능력과 자격도 없다. 하지만 선배 선교사들의 오랜 고민을 공론화해보자는 것이다.  지난 번 아프리카 방문기록도 그런 차원이다.  이 글은 오랜 연구와 고민의 산물이다. 청년 시절부터 한국보다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산업화를 앞서고도 낙후된 필리핀의 문제는 무엇인지,  선교사, 지망생 선교를 열망하는 이들의 무작정 방문지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80% 이상의 가톨릭 인구와 10% 의 개신교도가 있는 데도 기독교 선교사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넘쳐나는 선교사 숫자, 특히 대도시(마닐라)에 집중된 이유는 무엇인지?  현지의 선교사들은 일찌기 "왜 필리핀에 자신들이 필요한가" 에 대하여 자문했지만 아직도 선교사들은 밀려가고 있는 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이 점에 대하여 피선교지의 동역자들과 정직하게 논의해 봐야 할 것이다. 

마침 방문한 날  필리핀에서 한국인 3명이 총격으로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필리핀에서 한국인이 피살된 건 올해 들어 네 번째(6명)라고 한다.  이는 11일 필리핀 바콜로시의 한 사탕수수밭에서 한국인 A(51), B(46), C(48·여)씨가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이 중 A씨는 발이, C씨는 손이 테이프로 결박된 상태였는데 한국에서 투자회사를 운영하다가 도피중인 자들로 알려졌다. 이처럼 한인들의 경우 범죄자나 도피성 외유가 많다고 한다.    

※ 글 싣는 순서
 1. 지정학적 위치와 국가와 기독교 정보 
 2. 한국식 전도 언제까지  
 3. 한국교회의 필리핀 선교역사
 4. 필리핀에서의 PCK 선교 

   
 

필리핀은 태평양과 인도양 사이 7,107개의 섬으로 구성된 나라로 북에서 남으로 1,000마일로 펼쳐져 있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군도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북쪽의 루손과 남쪽의 민다나오가 국토의 65%를 차지하고 있다. 스페인-미국전의 결과 1898년에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양도되었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점령되었다가 1946년에 독립되었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21년간 통치하다 민중들의 항쟁에 의해 추방되었고, 1992년에는 미군이 완전 철수하였다. 무슬림 분리주의자들과 민다나오섬을 두고 벌여온 25년간의 게릴라 전쟁은 120,000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1996년 협정을 통해 마무리되었다. 목재, 구리, 니켈이 주요 수출품이다.

필리핀인(人)은 기본적으로 말레이 인종에 속하지만, 여러 차례에 걸친 이주의 결과 형성된 것으로 풀이된다. 첫째, 아시아 대륙과 연결되어 있던 빙하기에 동남아시아에서 건너온 아에타족(族:니그로이드에 속함)의 조상(인류학상으로는 프로토 말레이인), 둘째, 대륙에서 분리되고 난 뒤 인도네시아, 중국의 화남(華南), 인도차이나 방면에서 바다를 건너온 산지 미개발 부족의 조상(인류학상 인도네시안 A.B), 끝으로 BC 2~3세기부터 14∼15세기 사이에 인도네시아 방면에서 건너온 문명화한 여러 평지 부족(오늘날 필리핀인의 대부분)의 조상(인류학상 말레이인)으로 형성되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고립된 정착 생활이 계속되었다는 사실은 현재의 여러 부족 사이에 100여 개의 언어 및 방언이 존재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언어는 타갈로그, 일로코, 팜팡고, 비콜, 세부아노, 일리가이논(일롱고), 와라이와라이(사마르-레이테), 마긴다나오, 팡가시난 등 말라야-폴리네시아어파(語派)의 9자매어(姉妹語)이다.

1946년 독립 이후 타갈로그어(語)를 기초로 한 필리핀어(語)가 국어로 쓰이고 있으며 영어도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에스파냐 문화가 파급되기 이전부터 힌두, 이슬람, 중국 문화가 전래되기는 하였으나 당시에는 변경지대에 불과하였던 이 나라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다. 따라서 여러 부족이 할거하던 상태에서 벗어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통일을 이루게 한 것은 에스파냐와 미국의 식민지 지배였다.

에스파냐 사람들이 들어오기 이전에도 산스크리트나 아랍 문자에서 유래한 자모(字母)를 가지고 있었으며, 14세기 이후에는 민다나오섬에서 루손섬에 이르기까지 이슬람교(敎)가 전파되었다. 16세기에 에스파냐 사람들에게 정복된 이후에는 이슬람 세력이 남부로 쫓겨나기는 하였으나 이슬람교도(모로족)들은 외국의 지배에 굴복하지 않고 독자적인 생활과 문화를 고수하였으며 오늘날에도 국가적 통일을 저해하는 소수민족 문제의 핵심이 되어 있다.

한편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된 뒤에는 중국인들의 유입이 본격화하여 상인, 기술자로서 식민지 경제에 큰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여러 차례에 걸친 추방과 학살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지위를 지켜왔다. 더욱이 필리핀 사람들과 활발한 혼혈이 이루어져 필리핀의 유력한 경제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들의 후예이다.

에스파냐 사람들 역시 식민지 지배와 포교 과정에서 원주민 상류층과의 혼혈이 빈번히 이루어졌다. 이 밖에 미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과의 혼혈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메스티소(혼혈아)를 탄생시킴으로써 필리핀 사회에 독특한 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종교적으로도 아시아에서 일찍이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는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필리핀의 인구는 89,468,677명(2006.7) 인구성장률은 2.07%이며 주요 인종은 말레이인 95.5%, 중국인 1.5%, 기타 3% 이다. 연령구성은 0세-14세 (37%), 15-64세 (59%), 65세 이상 (4%)이며 평균수명은 67.48세 (남 64.65세, 여 70.46세)이며 종교는 로마카톨릭(83%), 프로테스탄트(9%), 이슬람(5%), 불교 및 기타 (3%) 주요언어로는 타갈로그어와 영어을 쓰는 데 영어는 공용어로도 쓰인다.

국민
필리피노로 불리는 대다수 주민들은 주로 중국인과 혼혈이거나 미국인 또는 스페인계와 혼혈인 말레이 인종이다. 공식 언어는 타갈로그어(전체인구의 1/3이 마닐라 일대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기초로 한 필리핀어와 영어이다.

그밖에 전체인구의 약 1/4이 사용하는 세부아노어를 비롯해서 일로카이노어·힐리가이노어·비콜어 등 수십 종의 다른 언어들이 쓰인다. 인구의 4/5 이상이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고 이슬람교도들도 상당수 있다. 가톨릭계의 필리핀 독립교회파(아글리파이파) 신교도 약간 있으며, 그밖에 개신교 주요종파도 있다. 인구밀도는 비교적 높은 편이고 인구의 35.9%가 15세 미만이다.

1970년대부터 시행된 가족계획사업은 특히 시골지역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다. 평균수명은 남자가 66세, 여자가 70세이다. 농촌에서 도시로의 대규모 이동은 특히 대도시 마닐라에 심각한 과밀현상을 초래했다. 전체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으며, 해외로 나가는 수많은 이민 가운데는 고도로 숙련된 인력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민 가는 사람과 이주해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서로간에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경제
필리핀 경제는 주로 농업·경공업·서비스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 20세기말에 이르러 정부의 간섭이 늘어나긴 했지만 시장경제가 지배적이다. 물가는 구매력보다 더 빨리 상승된 반면 임금은 동아시아에서 최저 수준이다. 실성장률이 마이너스 상태인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다른 개발도상국들과 비슷하다. 총노동력의 2/5 이상이 종사하는 농업은 국내총생산(GDP)의 1/4을 차지한다. 농민의 다수가 소작농이며 국토의 1/4 이상이 경작에 적합하나 관개시설이 부족하다.

정부와 여러 국제기구들이 관개농지를 넓히려는 여러 사업을 후원하고 있지만 농업의 자급자족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쌀이 주요농산물이며, 몇몇 섬에서는 옥수수 재배가 주종을 이루기도 한다. 쌀의 경우 다양한 개량종들이 선을 보였고 다량의 비료가 현재 사용되고 있지만 산출량은 크게 늘지 않고 있다. 굴지의 코코넛 생산국으로 코코넛열매와 코프라뿐 아니라 코코스야자유를 주로 수출한다. 사탕수수·바나나·파인애플 등도 널리 재배되며, 외화 수입원으로서 종래의 마닐라삼과 담배를 대신한다.

만연된 불법 벌목행위와 아직도 존속하고 있는 이동농경방식 때문에 필리핀의 삼림은 계속 고갈되고 있다. 질 좋은 목재와 베니어판이 일본·영국·미국 등지에 대량으로 수출된다. 광업은 GDP에서 적은 비율을 차지하지만, 구리·금·철광석 등은 외화 수입원으로 적지 않은 몫을 한다. 제조업은 GDP의 1/4을 차지하며 총노동력의 1/10을 고용한다. 주요 제조업으로는 식품가공, 음료·석유제품·섬유·신발 등의 생산이 손꼽힌다. 정부는 전기 및 전자 기기 조립업을 포함한 노동집약형 산업의 육성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도로는 1/7 정도만 포장되어 있으며, 마닐라와 막탄 섬의 세부 근교에 국제공항이 있다.

필리핀 제1의 항구는 마닐라에 있다. 그러나 수송의 하부구조가 빈약하여 늘어나는 농산물량을 처리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전기 및 전자 제품과 부품, 코코넛 제품, 의류, 과일과 야채, 설탕과 설탕제품 등을 수출하며, 광물연료·자본재·곡물·화학제품 등은 수입한다. 무역수지는 종종 역조현상을 보인다. 주요 무역 상대국은 미국과 일본이고 해외 근로자들이 보내는 송금이 중요한 외화 수입원이다. 정부의 예산 지출은 전통적으로 수입을 초과해왔지만 1994년을 넘어서며 흑자로 돌아섰는데 외채는 1980년 이후 갑자기 늘어났다. 

정치와 사회
1987년에 제정된 필리핀 헌법(1973년에 제정되어 1981, 1984년에 개정된 헌법을 대신함)에 따라 국가 원수인 대통령이 행정권을 행사한다. 대통령은 6년 단임제로 직접선거로 선출되며, 대통령이 임명한 각료들로 이루어진 내각이 국가의 일상 행정업무를 담당한다.

입법권은 221명의 하원의원과 24명의 상원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의 필리핀 의회에 부여된다. 하원의원은 각 선거구에서도 선출되지만 많은 수가 임명되며, 상원의원은 대체로 선출된다. 사법부 최고기관은 정치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대법원이다. 정당들에 내려진 계엄령이 1978년에 해제되었고, 1980년대 중반 이후로 파르티잔의 정치활동이 활발하다. 필리핀 이슬람교도의 자치권을 요구하는 단체와 공산주의자가 이끄는 불법 정치조직도 활동하고 있다.

보건시설과 의사들은 외곽 시골지역보다 마닐라에 약 15배나 많이 있다. 영양실조가 만연되어 있고, 보건에 대한 수요는 계속 늘어나 현재의 시설과 요원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태이다. 주택난이 심각하며, 공유지 무단 거주자들이 모여 사는 몇몇 공동체(특히 마닐라 주변)에는 기본적인 보건·위생 시설도 없다. 문자 해독률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비해 비교적 높다. 6년제인 초등교육은 공식적으로 의무교육이며, 공립학교에서는 무상교육이 실시되어 대부분의 아동들이 혜택을 받는다. 대부분 20세기초에 설립된 다수의 대규모 종합대학교들이 마닐라에 집중되어 있다.

언론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으며, 필리핀어, 영어 및 그외 수많은 지방어로 신문이 발간된다. 필리핀 전역에 걸쳐 많은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국이 운영되고 있다.

필리핀의 종교
필리핀의 스페인, 미국, 일본 등의 식민통치 영향으로 동서양이 교체되는 복합문화형태를 띄고 있으며 천주교가 국교로 되어 있으나,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천주교 신자가 83.6%이나 다수가 전통무속종교 와 혼합되어 있으며 미신적인 신자들이다. 개신교는 전체 인구의 10%정도이며 그중 5.2%가 열심히 있는 신자이다.

Philippine Crusade Inc. 에 의하면 1991년 8월 현재 전국에 22,1888개의 교회가 있으며 전체 인구에 비하면 한 교회가 2,815명을 감당해야 하는데 실제 교회참석 인원은 평균 58명으로 나타났다. 이 들은 개신교인의 비율을 5.2%로 집계하여 선교의 가능성을 증명해 주었다. 또한 이들이 벌리고 있는 K.A.W.N. 2000 운동은 2000년 까 지 전국 5만개의 동네에 적어도 한 교회를 세우자는 것인데 앞으로 도 23,752개의 교회가 더 필요한 상태이다.

1899년 최초의 개신교 미국 선교사가 들어온 후 지급까지 필리핀은 어느 나라보다 예배하며 활동하기에 자유롭다. 2,000여명의 선교 사들이 방방곡곡에서 일하고 있으며 300며 개의 교단이 등록되어 있 고 드 결과 이미 굴직한 교회들이 여럿 생겨났다.

동남 아시아 지역에서 주후 1500년에서 1700년 사이에 원주민들 가운데 대다수가 신앙을 고백하는 기독교인이 된 섬은 필리핀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운시상태에 있었으며 종교적으로 고등 신앙(higher faiths)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단지 이슬람교만이 아시아 대륙에서 종교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슬람이 세워진 곳에서 기독교는 많은 진척을 보이지 않았다. 필리핀에서 회교가 기독교보다 앞섰다. 스페인 사람들이 오기 전에 보르네오로부터 모슬램 상인들이 먼저 화서 그들의 신앙을 가 르치고 있었다. 이슬람이 1세기 또는 2세기를 앞질렀기 때분에 필리 핀 섬들이 기독교화되기보다 이슬람화 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스페인 선교사들이 때에 맞게 도착했다.

물론 남쪽에 많은 모슬렘 교도들이 있었다. 스페인 정복이 시작된 몇년 후인 1573년에 큰 북쪽 섬인 루손섬의 운주민들 중 얼마는 (특히 해안쪽) 모슬렘교도였다. 남쪽에 흩어진 모슬렘교도들이 부분적으로 민다나오의 통치자와 교 전이 있은 후 부분적으로 이슬람의 전도가 금지되었고, 이슬람교도 들의 집이 파괴되었으며 기독교의 가르침만이 허락되었다. 북쪽에서 는 기독교가 이슬람이 발판을 만드는데 방해가 되었다.

필리핀이 기독교화되었던 요인은 구미와의 접촉 때문이었다. 뚜렷 한 영향을 준 나라는 영향을 준 나라는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18세 기까지 유럽국가들 가운데에서 가장 공격적이며 포르투칼과 네덜란 드보다 어 힘이 강한 나라였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 필리핀은 거 의가 스페인의 소유가 되었다. 스페인의 선교사가 동남아시아에서 다 른 지역보다 필리핀에서 더 큰 부분을 차지했다.

서구인들의 주요 목적은 상업이 었고 기독교 신앙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필리핀 에서 상업보다 선교가 더 꾸렷했고 정치적 정복보다 기독교 전파가 앞섰다. 필리핀은 아시아 선교를 위한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선교사들은 더 많은 기독교인들을 얻었으며 선교사들이 동인도와 인도 차이 나, 중국, 대만, 일본 등으로 갔다. 실제로 필리핀은 스페인의 정치적 종교적 정복을 위한 전략지로 생각되었다.

마젤란(Ferdinand Magellan, 포루투칼 탐험가)은 챨스 5세 활제의 명령으로 지구의 정반대로 항해하여 유럽인들 일행과 함께 1521년 필리핀 막탄선(Mactan)에 도착하였으며 약 한달 후인 5월에 라푸라 루라는 추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529년에 포르투칼인의 경계선 확장을 필리핀에 두었으나 스페인 사람들이 섬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1542년에 빌라로보스 (Villalo-bos)의 원정이 실패했으나 1565년에 레가스피(Lopez de Legaspi)의 영도 아래 섬들의 정복이 시작되었다. 필리핀을 정복한 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스페인의 정복의 확장이었다. 스페인 사람 들이 필리핀 회심자들을 얻은 것은 놀라울 만한 것이었다.

마젤란과 빌라로보스에 의한 필리핀 회심자들이 생겨나긴 했으나 정치적 정복 처럼 영구적인 기독교를 심은 것은 레가스피에 의해서였다. 레가스피 의 지시에 의하면, 모든 탐험가들은 그리스도인들처럼 행동해야 하 며, 주님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을 공경해야 하며, 원주민들을 잘 대 우해야 하며, 종을 사고 파는 일에 종사하지 말아야 했다.

레가스피와 함께 5명의 어거스틴 수도승들이 왔으나 그 중에 3명 만이 필리핀 섬에 남았다. 어거스틴 교단에 이어서 1577년에 프란시 스교단이 도착했으며, 1578년에 도미니크 교단이 교황의 명령으로 마 닐라에 주교구 성당을 세우기 위해 들어왔으며, 이러서 제수잇 교단 이 들어왔다. 이들은 점유한 후 1세기 동안 종교적 열정과 군사적 정복의 결합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필리핀 회심자들을 얻는 데 성공 케 했다.

필리핀에서의 기독교 역사
필리핀의 스페인, 미국, 일본 등의 식민통치 영향으로 동서양이 교체되는 복합문화형태를 띄고 있으며 천주교가 국교로 되어 있으나,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천주교 신자가 83.6%이나 다수이나 다른 국가와는 다르게 전통무속종교와 혼합되어 있으며 미신적인 신자들이라는 평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국가이면서도 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사역지로 정하는 이유다. 한마디로 필피핀의 천주교회 혹은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개신교는 전체 인구의 10%정도이며 그중 겨우 5.2%만이 열심 있는 신자로 본다. 그런데 개신교 선교사가 넘쳐나는 것은 미국 선교사들의 오랜 선교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의 주둔으로 교통의 편리와 영어권에 보안이 외부인에 대한 안전이 보장되고 생활비가 저렴하며 선교사에게 비교적 자유로운 문화적 여건과 생활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영어권이라는 것 과 저렴한 생활비로 일단은 나가고 보자는식의 션교지망생이나 도피형 선교사들이 넘쳐나는 것이다.

1899년 최초의 개신교 미국 선교사가 들어온 후 지금까지 필리핀은 어느 나라보다 예배하며 활동하기에 자유롭다. 2,000여명의 선교사들이 방방곡곡에서 일하고 있으며 300여 개의 교단이 등록되어 있고 그 결과 이미 굵직한 교회들이 여럿 생겨났다. 70년까지만 해도 4,300여 교회이던 것이 80년에 13,600 교회로 90년에 27,000교회로 성장하고 있다. 또한 성장한 교회 들도 주로 성령운동을 하는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이 많은 편이다.

필리핀은 아시아 지역에서는 가장 많은 선교사가 있는 나라다. 성경보급률도 164개의 언어중에 134가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고, 31개는 신약만 50개가 쪽복음만 번역된 상태이다. 교육에도 열심이어서 1974년 통계로 신학교 74개이던 것이 91년통계로 210개의 교회 혹은 기관이 신학교 혹은 교육기관으로 등록되었다. 신학교육도 주로 서양의 시상을 번역하여 가르치는 단계에 있으며 많은 학교들이 지역여건을 고려하여 신학연장교육(TEE)을 많이 실시하고 있다. 문서전도기관도 63군데나 등록되어 있고 이들이 도서를 펴내고 전도지를 개발하며 교육자료, 성경공부안, 기타 신앙지를 만들고 있다. 기독교방송과 텔레비젼 방송국이 있어 방송을 통한 전도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2) 카톨릭 선교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주후 1500년에서 1700년 사이에 원주민들 가운데 대다수가 신앙을 고백하는 기독교인이 된 섬이 필리핀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원시상태에 있었으며 종교적으로 고등 신앙(higher faiths)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단지 이슬람교만이 아시아 대륙에서 종교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슬람이 세워진 곳에서 기독교는 많은 진척을 보이지 않았다. 필리핀에서 회교가 기독교보다 앞섰다. 스페인 사람들이 오기 전에 보르네오로부터 모슬렘 상인들이 먼저 와서 그들의 신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슬람이 1세기 또는 2세기를 앞질렀기 때문에 필리핀 섬들이 기독교화 되기보다 이슬람화 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스페인 선교사들이 때에 맞게 도착했다. 물론 남쪽에 많은 모슬렘 교도들이 있었다. 스페인 정복이 시작된 몇 년 후인 1573년에 큰 북쪽 섬인 루손 섬의 원주민들 중 얼마는 (특히 해안쪽) 모슬렘교도였다. 남쪽에 흩어진 모슬렘교도들이 부분적으로 민다나오의 통치자와 교전이 있은 후 부분적으로 이슬람의 전도가 금지되었고, 이슬람교도들의 집이 파괴되었으며 기독교의 가르침만이 허락되었다. 북쪽에서 는 기독교가 이슬람이 발판을 만드는데 방해가 되었다.

필리핀이 기독교화 되었던 요인은 구미와의 접촉 때문이었다. 뚜렷하게 영향을 준 나라는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18세 기까지 유럽국가들 가운데에서 가장 공격적이며 포르투칼과 네덜란드보다 힘이 강한 나라였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 필리핀은 거의가 스페인의 소유 가 되었다. 스페인의 선교사가 동남아시아에서 다른 지역보다 필리핀에서 더 큰 부분을 차지했다. 서구인들의 주요 목적은 상업이었고 기독교 신앙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필리핀에서 상업보다 선교가 더 뚜렷했고 정치적 정복보다 기독교 전파가 앞섰다. 필리핀은 아시아 선교를 위한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선교사들 은 더 많은 기독교인들을 얻었으며 선교사들이 동인도와 인도차이나, 중국, 대만, 일본 등으로 갔다. 실제로 필리핀은 스페인의 정치적 종교적 정복을 위한 전략지로 생각되었다.

마젤란(Ferdinand Magellan, 포루투칼 탐험가)은 챨스 5세 황제의 명령으로 지구의 정반대로 항해하여 유럽인들 일행과 함께 1521년 필리핀 막탄선(Mactan)에 도착하였으며 약 한달후인 5월에 라푸라 루라는 추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529년에 포르투칼인의 경계선 확장을 필리핀에 두었으나 스페인 사람들이 섬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1542년에 빌라로보스 (Villalo-bos)의 원정이 실패했으나 1565년에 레가스피(Lopez de Legaspi)의 영도 아래 섬들의 정복이 시작되었다.

필리핀을 정복한 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스페인의 정복의 확장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필리핀 회심 자들을 얻은 것은 놀라울 만한 것이었다. 마젤란과 빌라로보스에 의한 필리핀 회심자들이 생겨나긴 했으나 정치적 정복처럼 영구적인 기독교를 심은 것은 레가스피에 의해서였다. 레가스피의 지시에 의하면, 모든 탐험가들은 그리스도인들 처럼 행동해야 하며, 주님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을 공경해야 하며, 원주민들을 잘 대우해야 하며, 종을 사고 파는 일에 종사하지 말아야 했다.

레가스피와 함께 5명의 어거스틴 수도승들이 왔으나 그 중에 3명만이 필리핀 섬에 남았다. 어거스틴 교단에 이어서 1577년에 프란시스 교단이 도착했으며, 1578년에 도미니크 교단이 교황의 명령으로 마닐라에 주교구 성당을 세우기 위해 들어왔으며, 이어서 제수잇 교단이 들어왔다. 이들은 점유한 후 1세기 동안 종교적 열정과 군사적 정복의 결합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가 필리핀 회심 자들을 얻는 데 성공케 했다.

기독교는 필리핀 사회에 많은 일을 했으며 오늘날 필리핀 사람들의 72%가 아시아에서 단지 명목상 그리스도인 국가로 만든 카톨릭 교회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스페인의 필립 2세에 의해 식민정책의 주요목적으로 신앙을 전파하게 하여 교회, 병원, 학교들을 세웠으며 원주민 성직자들을 훈련시켰다. 처음 필리핀 감독 조르게 바르린(Jorge Barlin)이 생겨난 후로 1905년까지 주교감독이 생기지 않았다. 이슬람이 인도네시아로부터 북쪽으로 퍼질 때 카톨릭이 이슬람의 전진을 막는 역할을 했다.

비기독교인들 가운데에는 수년 동안 산 속으로 쫓겨난 일백만 정도 의 부족들과 이방인들이 있다. 또한 민다나오(Mindanao) 남쪽 섬에 주로 모여 사는 모로스(Moros)라 불리는 2백만의 모슬렘교도들이 있다. 마닐라에 30만의 중국인들이 있으며 주요 도시들 가운데 주로 종교적으로 불교인, 문화적으로 유교인 들이 있다. 필리핀 독립교회(Philippine Independent Church)가 아글리파안 교회(Aglipayan Church)교회로 언급되기도 하는데 그 지도자 그레고리오 아글리피아(Gregorio Aglipay)가 로마에 반대하여 독립 국가적인 카톨릭 교회를 설립했는데 1902년에 형성되었다.

수년간 필리핀 독립 교회는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자유진영과 보수진영 사이의 불화로 인해 교회에서의 분열을 가져왔다. 1948년 이래로 필리핀 독립 교회의 세 감독들이 미국인 대주교의 손에 성별 식을 받았을 때 두 교파 가 협력하여 일했다. 케손시에 있는 성 안드루 신학교(St.Andrew"s Theological Seminary)가 지금 연합기구이며 두 교파 간치 성직자들 을 훈련시키고 있다. 1961년 이후로 그들 사이에 친밀한 교섭이 있었다. 필리핀 독립 교회는 150만 이상의 회원들을 가지고 있으며, 수십 개의 교구 안에 약 40명의 감독들을 가지고 있다.

3) 개신교 선교
미국으로부터 개신교 선교협회들이 들어왔다.  그 첫 번째가 미국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였다. 장로교 개척선교사는 1899년 4월에 도착한 제임스 로저스 박사(Dr. James B.Rodgers)였다. 두마케티시에 있는 유명한 실리만 대학교(Silliman University in Cumaguete city)는 1901년에 장로교인에 의해 창설되었다. 처음부터 장로교회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주장했다. 1907년에 그들은 마닐라에 연합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를 세우기 위해 감리교인 들과 손을 잡았다.

1992년에 그들은 연합복음주의교회(United Evangelical Church)를 형성하기 위해 회중교인들과 연합형제회들과 통합했다. 1947년에 교회와 선교가 통합했으며 그 후 선교사들은 형제의 일꾼들로서 교회에서 봉사했다. 1948년 이후는 장로 교인들의 일이 필리핀 연합교회를(United Church of Christ in the Philippines) 구성하는 부분이 되어왔다. 지난 10년 동안 우호적인 일꾼들의 수가 감소했다. 대략 1/3이 교회 일에 머물렀고 나머지는 의료와 교육과 행정 일에 머물렀다.

필리핀에 들어간 두 번째 선교회는 감리교 성공회(Methodist Episcopal Church)였다. 감독 제임스 써번(Bishop James M. Thoburn)은 1899년에 마닐라를 방문하여 필리핀 섬들에서 사역을 의논했다. 처음 선교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초기의 회심자인 니콜라스 자모라 목사가 일을 수행한다. 처음 선교사들은 1900년 2월에 마닐라에 도착 한 WFMS에 소속한 5명의 여자들이었다. 한 달 후 토마스 마틴 목사가 도착했고 이어서 후에 감독이 된 호머 스텐츠 (Dr.Homer C.Stuntz)박사가 일을 수행했다.

여성들을 위한 첫 성경학교가 위니 프레드스폴 딩 양(Miss Winifred Spaulding)에 의해 열렸다. 첫 선교 회의는 1905년에 조직되었고 1908 년에 정기회의를 가졌다. 감리교 성공회는 세 번(1905, 1909, 1933년)이나 갈라졌다. 첫 필리핀 감독이 1944년에 임명되었다. 오늘날 감리교회는 5개 연회로 조직되었고 모 든 주요 직위들은 필리핀인 들이 차지하고 있다. 미국 선교사들은 협력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1952년까지 필리핀 연합교회의 문제로 감리교회의 사역이 북 루손섬에 한정되었으나 그 이후로는 교회와 선교 일이 민다나오까지 확대되었다.

미국 침례교(American Baptists)는 1900년에 현지에 도착하여 파나니(Panay)와 네그로스(Negros)섬들에 노력을 집중했다. 에릭 룬트박사(Dr.Eric Lund), 스위스 침례교 선교사는 미국 침례교 외국인선교사협회의 처음 대표자였다. 그와 그의 동료 브라우리오 마니칸(Braulio Manican)은 1912년 파나이어와 비사얀어 성경번역을 마쳤다. 첫 선교 병원이 안드루홀 박사(Dr. Andrew Hall)에 의해 일루일루(Iloilo)에서 열렸다. 1905년 미스 안나 쟌슨(Miss Anna Johnson)은 침례교 선교사 훈련학교를 세웠다. 필리핀 침례교회 협의회는 1935년에 형성되었는데 세례 교인 3만을 가진 교회로 300여 교회가 있다.

다음은 1901년에 생긴 그리스도의 제자교회(The Disciples of Christ)가 있다. 그들은 마닐라를 피하여 북 루손으로 갔으며 라오악 (Laoag)에 본부를 세웠다. 1901년과 1954년 사이에 이 선교회의 70명의 선교사들이 이 섬에서 사역했다. 1943년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복음주의교회를 형성하기 위해 연합형제회(United Brethren)와 통합했다. 이들은 후에 필리핀 연합교회가 1948년에 조직될 때 가장 큰 연합회원이 된 교회이기도 하다.

1902년에 외국선교를 위한 미국인 이사회는 일치에 의해 민다나오 남쪽 섬으로 할당되었다. 그 당시 50%가 명목상 카톨릭 교도였고 30% 가 모슬렘교도였으며 나머지는 이방인이었다. 개척 선교사인 블랙 목사 부부(Rev.and Mrs.R.F.Black)는 다바오 (Davao)에 위치했다. 회중교회는 연합복음주의교회를 형성하기 위해 1929년에 장로교회와 연합형제교회와 통합했다. 1948년에 새로 형성된 필리핀 연합교회의 일부가 되었다.

미국성공회(Protestant Episcopal Mission)는 1902년에 일을 시작했다. 이들은 항상 마닐라에 있는 영미 사회에 중요한 사역을 계속해 왔다. 또한 루손 산간지역의 이고롯쪽(Igorots) 과 남쪽 민다나오의 원주민들을 중심으로 선교를 펼쳤다. 성 안드루 신학교와 트리니티 대학이 필리핀 독립교회와 지금 손을 잡고 일하고 있다. 필리핀 성공회는 거의 6만 명에 이르는 세례교인들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선교연맹(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은 1902년에 민다나오 남부 섬에서 일했 으며 여러 달 후에 선교사가 콜레라로 죽자 일을 보류하기도 했다. 수년 후인 1908년에 일을 시작하여 2커플을 얻었고 1941년에는 30명의 사역자를 얻었고 1947년에는 필리핀 기독교선교연맹이 독립하게 되었다. 1969년에는 558명의 회원들을 얻었다. 세례교인은 2만을 확보했다.

여러 수준에서 기독교인 훈련을 하 는 4개의 성경학교를 운영했으며 평신도 지도자 들을 훈련시켰다. 2백만장 이상의 복음서를 정기적으로 찍어내는 연합출판사를 만들었다. 또 한 라디오 방송도 민다나오에서 활발히 추진되고 있는 사역중 하 나이다. 1958년에 시작된 좋은 소식시간(Good News Time)은 22주간 방송으로 확대되었고 그 중에 4개의 상업방송과 하나의 교회와 관계 된 방송을 가지고 있다.

제칠일 재림교(Seventh Day Adventists)는 1910년에 필리핀에서 선교를 시작하였고 여러 곳에 강한 조직을 가지고 있다. 174개의 초등 학교, 20개의 고등학교, 2개 대학과 6개의 병원을 가지고 있다. 교회 개척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125,000명의 회원을 모았고 1,165개 정도의 교회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성회(The Assemblies of God)는 미국에서 회심하여 미 국 성경학교에서 훈련받았던 필리핀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다. 자기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강한 열정을 가지고 1930년에 필리핀에 돌아와 하나님의 성회 교회를 세웠다. 오늘날 이들 중 몇몇은 훌륭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에서처럼 하나님의 성회는 복음 전도와 교회개척에 열심이다. 오늘까지 각 지역에 6개의 성경학교를 세웠고 1964년에 극동신학교(Far East School of Theology)를 마닐라에 세웠다. 성경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연장교육을 시키려는 목적이었다. 현재 425교회에 5만의 세례교인을 확보했으며 700명의 자 국인 사역자들과 45명의 선교사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연합그리스도 교회(United Church of Christ in the Philippines : UCCP)는 1948년에 연합교회를 형성하기 위해 세 개의 교파가 통합 을 했다. 이 교파들은 연합복음주의교회(장로교회와 회중교회: United Evangelical Church)복음주의교회(연합형제교회와 그리스도의 제자교회: Evangelical Church), 필리핀 감리교회(독립교회 : Philippine Methodist Church)였다. 다섯 개의 미국인 교파들이 연합 교회와 협력했다(그리스도의 제자교회, 연합장로교회, 연합 감리교회, 개혁교회, 연합그리스도교회).

이들 교회에서 연합교회에 70여명의 선교 사역자들을 할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선교부는 교육, 의료, 행정사역에도 해마다 협력을 해왔다. 해마다 4-5%의 성장률을 가지고도 엽합교회는 1,400명의 모든 전도자들에게 신학교 훈련사역을 후원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400명만이 목사로 임명되었다. 연합그리스도 교회는 160.000명의 세례교인을 가진 분명히 필리핀에서 가장 큰 개신교회가 되었다. 연합교회는 성경학교, 학원, 중소 대학, 간호학교, 두 신학교와 실리만 대학 등 20개 이상의 학교를 세웠다.

선교현장에서 그렇게 내놓고 자랑할 만한 기독교 대학이 별로 없다. 1907년에 장로교인에 의해 세워진 두마케티시(Dumaguete)에 있는 실리만 대학(Silliman University)교는 필리핀에서 내놓을 만한 기독교 사립대학이다. 207명의 교수진과 3,500명의 등록학생들을 가지고 있다. 실리만 대학은 현재 연합그리스도교회와 관계를 갖고 있는 에큐메니칼에 속한 대학교이다. 필리핀중앙대학(Centeral Philippine University)은 미국 침례교회와 관계가 있는데 1905년에 일로일로(Iloilo)에서 시작 되었다.

1953년에 정부로부터 정식 인가 받은 학위를 수여하는 대학으로 10개의 중소 대학교로 구성되었으며 한 개의 신학교를 가지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후에 많은 선교 단체들이 일어났다. 이 선교단체들은 미개한 부족들에게 더많은 선교를 집중하고 있는 선교단체들이다. 남침례교선교회는 1948년에 마닐라에 있는 전중국선교사들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 빠르게 성장하여 북쪽에 루손 섬과 남쪽에 민다나오섬 과 중앙에 시부섬에 현재 1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 했으며 이미 145 개의 교회를 개척했고 그중 130개의 교회가 자립하고 있다. 세례교인 이 13,000명에 이르고 있다.

해외선교사협의회(Over Missionary Fellowship)는 1952년에 민도로섬(Mindoro)에서 선교를 시작했으며 그 당시까지 거주하는 개신교 선교사가 하나도 없었다. 오늘날 선교사의 절반이 부족들이 사는 산간지역에 교회를 개척했다. 그 중에 약 30,000명에 이르는 망얀 (Mangyan) 지역에 사는 원시생활을 하고 있는 6개의 주요 부족들에 게 선교를 하고 있다. 문서선교를 통하여 필리핀 교회들에게 큰 공헌을 하고 있는 선교 단체이다.

위클리프 성경번역(Wycliffe Bible Translators)선교회는 피트만 박 사(Dr. Richard Pittman) 의 인솔로 22명의 성경번역자들이 1953년에 필리핀에서 도착함으로 시작되었다. 1970년에는 150명의 선교사들이 42부족들 가운데서 일했다. 성경의 부분들이 23개의 언어로 번역 되었다. 이방인 부족들도 관심을 가졌으며 모슬렘 족에게까지 사역이 확 대되었다. 번역자들은 직접전도를 하지 않았으나 현재 36부족 가운데 신앙인들이 생겼다.

필리핀에서의 기독교의 공헌
기독교는 필리핀 사회에 많은 일을 했으며 오늘날 필리핀 사람들의 72%가 아시아에서 단지 명목상 그리스도인 국가로 만든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스페인의 필립 2세에 의해 식민정책의 주요목적으로 신앙을 전파 하게 하여 교회, 병원, 학교들을 세웠으며 원주민 성직자들을 훈련시 켰다. 처음 필리핀 감독 조르게 바르린(Jorge Barlin)이 생겨난 후로 1905년까지 주교감독이 생기지 않았다. 이슬람이 인도네시아로 부터 북쪽으로 퍼질 때 가톨릭이 이슬람의 전진을 막는 역할을 했다.

비기독교인들 가운데에는 수년 동안 산속으로 쫓겨난 일백만 정도 의 부족들과 이방인들이 있다. 또한 민다나오(Mindanao) 남쪽섬에 주로 모여 사는 모로스(Moros)라 불리는 2백만의 모슬렘교도들이 있 다. 마닐라에 30만의 중국인들이 있으며 주요 도시들 가운데 주로 종 교적으로 불교인, 문화적으로 유교인들이 있다.

필리핀 독립교회(Philippine Independent Church)가 아글리파안 교회(Aglipayan Church)교회로 언급되기도 하는데 그 지도자 그레고리 오 아글리피아(Gregorio Aglipay)가 로마에 반대하여 독립 국가적인 가톨릭 교회를 설립했는데 1902년에 형성되었다. 수년간 필리핀 독립 교회는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자유진영과 보수진영 사이의 불화로 인해 교회에서의 분열을 가져왔다.

1948년 이래로 필리핀 독립 교회 의 세 감독들이 미국인 대주교의 손에 성별식을 받았을 때 두 교파 가 협력하여 일했다. 케손시에 있는 성 안드루 신학교(St.Andrew's Theological Seminary)가 지금 연합기구이며 두 교파 간치 성직자들 을 훈련시키고 있다. 1961년 이후로 그들 사이에 친밀한 교섭이 있었 다. 필리핀 독립 교회는 150만 이상의 회원들을 가지고 있으며, 수십 개의 교구안에 약 40명의 감독들을 가

이들 교회에서 연합교회에 70여명의 선 교 사역자들을 할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선교부는 교육, 의료, 행 정사역에도 해마다 협력을 해왔다. 해마다 4-5%의 성장률을 가지고도 엽합교회는 1,400명의 모든 전도자들에게 신학교 훈련사역을 후원 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400명만이 목사로 임명되었다. 연합그리스도 교회는 160.000명의 세례교인을 가진 분명히 필리핀에서 가장 큰 개 신교회가 되었다. 연합교회는 성경학교, 학원, 중소 대학, 간호학교, 두 신학교와 실리만 대학 등 20개 이상의 학교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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