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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개혁가 조광조와 무너진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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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12.25  15: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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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개혁가 조광조와 무너진 꿈

요즘 어느 때 보다도 개혁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정치도 누가 더 개혁적인가? 를 겨룬다. 그러나 개혁은 말이나 주장이 아니다.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기도 하지만 진정한 개혁은 더디지만 함께 하는 것이다. 지금은 혁명적 상황이 아니고 어느 정도 정착된 사회로 개혁으로 인하여 더 이롭게 될 세상이나 제도의 완성을 원하는 이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따라서 원론적인 개혁과는 구분해야 한다.  지금 처럼 보혁의 대결이 정치나 제도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지역과 학연 이제는 종교까지 가세한 사회속에서 국민들은 혼란하다. 

따라서 예장뉴스가 연재하는 역사속에서의 개혁가들의 소환을 통하여 과거를 통하여 오늘을 바라보며 미래를 조망하고자 한다. 한가지 예만 들자 문재인 정권이 직면한 오는 4월의 서울과 부산시장의 보선 그 결과로 이어질 내년 대선의 주자들의 태도를 보자 앞서가던 이낙연은 주춤하지만 그의 트레이드인 화합과 통합의 이미지의 확장으로 전직 대통령들의 사면을 화두로 던졌다. 골수 민주당원들로 부터는 당분간 지지율이 빠지지만 문대통령이 이을 받아드리는 순간 역전될 것이다. 

반대로 이재명 지사는 이 구도에서 반드시 넘어서야 할 이대표와의 피할 수 없는 대결에서 공격적이지 않게 사면반대 구도를 통하여 존재감을 보이며 소원했던 친문들과 화합하는 이득이 있다. 그외 김두관이나 박영진의원등은 큰 상대가 아니다. 이는 야권보다는 후보군이 많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앞으로 대선도 그렇고 지도자들의 화두는 개혁이나 그러나 그 개혁이 여전히 구호나 피부에 다가보지 않는 한 표로 연결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여권의 지지률 하락은  부동산인데 돈을 번 사람도 박탈감을 갖은 사람들로 부터 모두 비판받기 때문이다.

"책을 안본 사람보다 한권밖에 보지 않은 사람이 더 문제다" 라는 말이 있다. 어설픈 지식이나 구체성없는 개혁안을 갖지 않고 얄팍한 용어로 사용하는 이들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교회안으로 이 구도를 가져와 보자 복잡하지만 교회개혁에는 급한 것과 중요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안이 긴 안목과 호흡으로 가야 하는 것에 종속되야 한다. 따라서 개혁으로 제거할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잃어버려서는 안될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교회개혁은 내가 한번 하다가 안되면 말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개혁자라고 자초하는 이들은 모두 역사속의 인물 조광조를 참조하기를 바라마지 않는 다.    

조광조의 생애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관직에 나간 선비중 가장 올 곧은 선비의 대명사지만 이에 못지 않게 너무 곧아 일찍 부러진 화살이라고도 회자된다. 조광조는 조선조의 학자요 정치가로, 호는 정암(靜庵)이다. 감찰 조원강(趙元綱)의 둘째 아들로 한성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북쪽의 어천도 찰방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희천에서 유배중인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에게서 수학했다. 이때부터 시문은 물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는 데 힘을 쏟아, 20세를 전후해서 가장 성실하고 촉망받는 청년학자로 꼽혔다. 또한 점필재(김종직의 호)의 학통을 이은 한훤당 제자가 된다.

학문이 깊고 행실이 돈독한 조광조는 이미 관직에 나가기도 전에 사림파의 촉망받는 선비가 되었고, 23세 때에는 유배도 당한다. 1504년(연산군 10년) 임사홍(任士洪)이 궁중세력과 결탁하여 신진사류의 제거한다. 곧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위될 때 신진사류인 이극균 · 김굉필 등이 이를 찬성했다 하여 이들을 처형하게 하고, 나머지 신진사류들을 삭탈관직하거나 유배를 보낸 것이다. 이것을 갑자사화(甲子士禍)라고 하는데, 조광조도 여기에 끼었다.

정암은 중종이 즉위한 지 6년째 되는 1510년(나이 29세)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을 한 후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자신과 뜻을 함께 할 많은 동료들을 사귀게 된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조광조의 인품과 학식에 감복한 나머지 자청해 그를 따라 학문을 배웠다. 나이 34세가 되는 1515년(중종 10)에는 성균관의 추천에다가 이조(吏曹)의 천거로 종6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제수 받았지만 헛된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는 일이 매우 부끄럽다는 뜻을 밝히며 벼슬을 거부했다.

   
 

감찰과 탄핵부서에서만 근무
그리고 마침내 과거급제를 통해 정식으로 벼슬길에 나서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 해 8월22일 알성시(謁聖試) 을과(乙科)에 급제한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典籍:정6품)에 올랐고 다시 사헌부 감찰(監察:정6품)로 자리를 옮겼다. 그 후 조광조는 호조(戶曹), 예조(禮曹), 공조(工曹) 등 여러 관직을 거쳤지만 대부분의 관직 생활을 관료들에 대한 감찰과 탄핵을 주요 임무로 하는 사헌부(司憲府)와 임금의 잘못에 대한 간쟁(諫諍) 및 논박(論駁)을 담당하는 사간원(司諫院), 임금에게 국정 자문을 하면서 정치의 시비(是非)를 가리는 간언(諫言)을 주로 하던 홍문관(弘文館)에서 보냈다.

그의 사화는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다. 그는 조정이 왕후 문제로 의견이 갈리자 “언로(言路)가 통하면 다스려지고 막히면 어지러워지며 망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종은 이후 조광조만 남기고 사헌부와 사간원을 모두 갈아치운다. 그의 말과 글은 개혁이라는 시대 분위기와 맞아떨어졌다. 임금은 신임했고, 정암은 제도를 하나씩 개혁한다. 그는 사회 모순이 사장(詞章, 시가와 문장)을 중시하고 도학(道學, 사람의 도리)을 경시하는 학문 풍토에 기인한다고 진단했다. 이런 분위기를 혁신하기 위해 도학을 높이고 왕도정치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개혁은 거침이 없었다. 전국에 여씨향약을 실시하고 미신이나 다름없는 도교 관청 소격서를 혁파했다. 일 처리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퇴계가 쓴 정암의 행장에 일화가 나온다. “양사(사헌부와 사간원)와 옥당(홍문관)이 소격서 파하기를 청하여도 여러 달 동안 윤허가 없었다. 선생이 동료들에게 이르기를 ‘오늘 윤허를 받지 못하면 물러갈 수 없다’ 하고 저녁에 대간들이 모두 물러갔는데도 옥당에 머물며 계(啓)를 논해 마침내 윤허를 받고 나오셨다.”

1519년 정암은 대사헌으로 승진한 뒤 과거제의 폐단을 보완하는 현량과(賢良科)를 도입한다.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추천받아 대책(對策)만 시험 보고 채용하는 제도이다. 명분은 이랬다. “나라가 선비를 뽑는데 오로지 과거에만 의지한다. 세도는 점점 멀어지고 과거 공부를 하는 자는 글이나 외는 데 힘쓰고 의리를 알지 못한다. 치도(治道)가 날로 떨어지는 것은 여기서 연유한다.” 그 결과 개혁 성향의 젊은 선비가 많이 등용돼 조광조를 지지하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신진사류 김식‧김정‧박상‧김구‧기준 등이다.

중종은 조광조 등 신진사류의 개혁을 기본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방법이 과격하고 미숙해 염증을 내고 있었다. 거기다 위훈삭제 조치가 반정을 반역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닌가 의심한다. 그러나 정적들의 모함에 못이긴 중종은 마침내 훈구 대신의 탄핵을 받아들인다. 조광조 일파에 처벌이 내려진다. 위훈 삭탈 4일 만에 일어난 기묘사화다. 선비 70여 명이 화를 입었다. 사림은 큰 충격을 받았다. 사림이 성장해 개혁을 눈앞에 두고 물거품이 되었다는 좌절감과 함께 희생자가 가장 많은 사화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곱씹을 대목이다. 

‘위훈삭제(僞勳削除)가 화근 

정암은 개혁이 점차 뿌리를 내리자 현량과 출신 신진사류들과 함께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히 추진한다. 위훈삭제는 중종반정 당시 책봉된 100명이 넘는 공신 중 하자가 있는 76명을 정리하자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훈구 세력의 집권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는 혁명에 가까운 개혁이었다. 훈구 세력은 강하게 반발한다. 홍경주‧남곤‧심정 등 훈구파는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움직여 임금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한다. 한편으로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가 왕이 되려 한다)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해 의심을 조장시킨다.

화순에는 기묘사화(己卯士禍)로 귀양을 왔던 정암(靜菴)을 추모하는 적려 유허비가 화순군 화순읍 화순군청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10㎞ 거리 능주면 잠정리에 있다. 그가 사약을 받고 목숨을 잃었던 장소에는 사후 148년 능주 목사가 세운 비각과 함께 유배생활했던 초가가 복원돼있고, 강당인 ‘애우당’과 영정을 봉안한 영정각 등이 새로 들어서 있다. 그리고 경기도 무덤이 있는 용인에는 그의 묘가 있다.

   
 

‘오호차(嗚呼此)’로 시작되는 추모비문을 살펴본다.

아, 이곳은 정암 조선생이 귀양 와서 별세하신 곳이다. 아, 이제 정암 선생께서 돌아가신지 149년이 되었는데도 기묘학사와 대부들은 그 학문을 사모하고 백성들과 하급 관리들은 그 은혜를 생각함이 오래될수록 더욱 잊지 아니하고 모두 말하기를 우리나라로 하여금 삼강오륜의 윤리를 알게 하여 되놈과 짐승이 되는 것을 면하게 하는 것은 오직 정암 선생의 덕택이라 하여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다 엄숙하게 머리 숙여 공경치 아니한 이 없으리라.

정암이 명을 단축한 것은 그의 여러 가지 개혁정책 때문이다. 그 첫 번째가 위훈 삭제로 중종반정으로 정국공신의 반열에 오른 117명 가운데 80여명에 대하여, 공적을 삭제했다. 조선 건국 때 개국공신 50여명, 세조 때 정난공신 40여명과 비교 시 중종반정 세력에 대한 공신책봉에 문제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과 전염병 치유를 빌고 기우제를 지내는 등 민심을 다독이던 재천의식에 대하여 성리학적 이상정치를 펼치는데 걸림돌로 보았다. 그래서 이를 주관하였던 소격서를 철폐했다.

사회 실천운동으로 향약(鄕約)을 실시했다.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잘못은 서로 바로 잡아주며(過失相規), 지방의 예속을 서로 권장하고(禮俗相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준다(患難相恤)는 취지를 담은 우리 실정에 걸맞은 4대 덕목을 마련했다. 이렇게 조선 팔도에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보급하는 운동을 펼쳐 향촌사회를 성리학의 이상과 질서에 맞게 개편해 나갔다.

또 민생을 위한 개혁에도 착수했다. 당시 농민을 가장 괴롭힌 공물(貢物·지방 특산물을 바치는 세금)의 폐단을 시정했다. 또한 토지를 국유화해 실제 농사를 짓는 농민에게 나누어주는 균전제와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만들어 개인의 과다한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한전제를 실시했다. 이는 훈구파 공신들의 세력 근거지인 노비와 토지를 빼앗아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다.

과거제는 유교적 소양과 문장력을 평가하는데는 유효하지만 내면적 심성과 도덕적 수양을 평가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이르 보완하기 위해 사림의 명망 높은 선비들을 관직에 임용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했다. 공신전(功臣田)과 녹봉의 감소를 추진했다. 그것은 조정과 유림(儒林)의 공론(公論)과 공의(公議)는 무시한 채 사적인 이익을 위해 권력을 전횡하고 남용하는 훈구파 세력에 대한 대공세였다.

그들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했는데 중심에 홍경주, 심정, 남곤이 있었다. 이들의 계략은 치밀했다. 중종의 안팎을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조광조를 흔들었다. 홍경주의 딸은 중종의 후궁 희빈이었다. 희빈은 중종에게 나뭇잎 하나를 내보였다. 그 나뭇잎은 벌레가 파먹은 자국이 남아 있었고 선명하게 ‘주초위왕 走肖爲王’이란 글자가 드러났다. ‘장차 조 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희빈은 물론이고 심정과 손을 잡은 경빈 박 씨도 가세했다. 이들의 베개 밑 송사는 중종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죽어서 다시 산 사람

그의 시신은 같은 사림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 당하고 고향인 현 도곡면 월곡리에 내려와 있던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의 손으로 거두었다. 당시 죄인의 시신을 거두는 일은 목숨을 내놓는 각오가 있어야 했기에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으나 조광조와의 각별한 사이였던 양팽손은 장남 응기(應箕)와 담양 소쇄원 주인 양산보 (梁山甫,1503~1557)와 함께 시신을 거뒀다. 섣달의 매서운 눈보라를 헤치고 60리 먼 길 쌍봉리 뒷산 증리에 가묘를 썼으며 이듬해 선영이 있는 용인의 심곡으로 운구하여 가족에게 인계했다. 이 일로 양팽손의 장남 응기는 벼슬길이 막혔고 정암의 제자였던 양산보는 벼슬길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소쇄처사를 자처하며 일생을 보냈다.

그로부터 149년 뒤 정미년(현종 8년, 1667)에 능주목사 민여로(閔如老)가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글을 받아 이 비를 세워 선생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되새기게 하였다. 정암 조광조를 추모코자 세운 것이 적려유허비이다. 적려란 귀양 또는 유배를 말한다. 조광조는 모든 백성이 고르게 잘 사는 사회, 성리학적 이념이 충만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실패의 원인은 타협과 조정을 배제한 급진과 미숙함이 원인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군주와 동거’ ‘적과의 동침’을 받아들이지 못한 원칙주의가 조광조의 꿈을 앗아간 가장 결정적인 이유이다. 훗날 퇴계 이황은 조광조에 대해 “뜻은 높으나 정세 전반의 파악 없이 무리하게 개혁을 추진한 점과 정치적 타협이 없었던 점이 아쉽다” 라고 평가했고 율곡 이이 역시 “조광조는 자질과 능력이 뛰어났지만 학문이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정치일선에 뛰어든 것이 아쉽다”라고 조광조의 개혁 실패를 평가했다.

조광조는 오늘날까지 조선시대 개혁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조선 전기의 대학자로 개혁 정치를 표방했던 정암 조광조 선생의 유배지에 세운 유허비로 역사적, 학술적으로 매우 귀중한 금석문이며 화순은 물론 우리나라 역사 현장으로서도 중요한 유적이다. 권력은 안주하려고 하는 속성이 있어 개혁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개혁은 혁명은 아니다, 개혁이란 가죽의 껍질을 벗기는 뜻이라는 의미에서도 볼 때 개혁의 대상과 주객관적 요인을 봐야 한다.

교회개혁에도 그렇고 개혁의 정신이나 인물은 필요하다. 그러나 개혁가는 자기 개혁을 수반해야 한다. 그러나 그 댓가는 참혹한 경우가 더 많았다. 개혁의 성과나 열매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반개혁적 세력의 득세를 가져오거나 역전되는 경우도 없잖아 있다. 그래서 Step by Step(한 걸음식) 이라는 서양 말도 있는 것이다. 멀리 가려면 소처럼 걸으라는(牛步千里) 라는 동양의 격언도 있는 것이다. 내가 끝장을 보려는 개혁, 자신의 공신을 남기려는 소영웅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조광조를 등용했던 중종마져 그를 버리게 된 것은 바로 요즘 말로 하는 개혁 피로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이 개혁이면 아무 것도 개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도 있다. 개혁은 대상이 있고 동반자가 있는 것이다. 개혁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한계가 운동의 한계가 되서는 안된다.  하다가 자폭하는 개혁이 아니라 정신을 잇는 개혁이 아쉽다. 평생 개혁이라는 말만 하다가 세월을 보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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