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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대 후임 총장 선임을 위한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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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2.01  08:3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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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신대 총장은 우리 교단 신학자를 대표한다.  

장신대 후임 총장 인선을 위한 시동이 걸렸다. 지난 29일 이사회는 총장선임준비위 위원장에 리종빈, 서기에 김영걸, 노창영목사, 이종걸장로 위원외에 교수평의회 신옥수교수, 직원평의회 이원식실장, 신대원 신학과 학우회장 오영근학생으로 조직했다. 공모 일정은 2월 23-22일까지 한국기독공보에 총장 지원 자격을 공고한후 접수하여 서류에 문제가 없는 분들은 3월 25일에 총장선임준비위가 주관하는 소견발표회(공개 검증) 과정을 거쳐서 준비위가 압축한 후보를 4월경 열리는 이사회서 최종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장신대 총장 선임이 교단의 큰 화제가 된 것은 직전 임성빈총장이 105회 총회에서 연임이 부결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초미의 관심사인 총장 인선에 대한 독자들의 알권리와 공인들에 대한 검증 차원에서 예장뉴스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글을 연재한다.   

1. 장신대 역사와 신학 
2.이사회(이사장)와 교수들(총장)
3. 바람직한 후임 총장 선출을 위한 제언(결론)

   
 

서론/ 장신대 총장은 교단의 중요한 지도자다 
장신대 총장을 지내신 김중은교수(구역학)가 20년전인 지난 2001년 장신대 창학 100주년을 맞아 기념비적인 강연을 한 바 있다. 거기서 장신대의 신학에 대하여 비판적 논의를 전개하시면서 장신대의 역사에 대하여 서두에 하신 말씀을 요약 인용하고자 한다. 이는 올해 120년을 맞는 장신대의 역사적인 해에 총장 인선으로 장신대 안팎이 관심이 뜨겁기 때문이다.  역사나 동문숫자 교수들 실력이나 교단의 배경으로 치면 장로교 신학대학중 세계최고이다.

그런 자긍심을 갖고 자축을 해야 할 시기에 가장 중요한 총장의 공백이 온 것이다. 장신대 교수들이나 이사회로는 누가 총장이 되느 냐가 중요하지만 일단 총장은 교단 지도부와 교단 산하 교회와 동문들에게도 중요한 지도자다. 따라서 장신대 가족들만의 총장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이사회가 원하는 총장이 아닌 교단 총회와 노회등으로 부터 지지를 받고 존경을 받는 분을 선출하여 보답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쉬운 점은 총회 직영 신학대학 총장이나 이사회가 교단 총회와 소통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귀담아 듣기 바란다. 

작금의 이사회나 교수들의 모습도 그렇고 교직원들 까지도 분열적 모습으로 인하여 실망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공모에 자그마치 7명이나 하마평에 오르내라고 있는 것이 그 반증이다. 이에 후임 총장은 총회가 위탁한 목회자를 길러내는 역할에서 부터 위기의 시대에 기독교회 역사를 이어갈 신학을 연구하고 모색하는 것도 포함된다. 따라서 정년이나 연장하려는 시도나 파벌이나 교권의 대리자가 아닌 진정으로 학자다운 면모를 지니고 미래를 향한 비전과 친화력, 통합력이 있는 분이 기대된다. 

1. 장신대 역사와 신학 
1945년 해방을 맞고 곧 한국장로교회는 분열을 거듭한다. 그러나 분열 그 자체는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것일 수도 있고 차라리 잘된 것이기도 하다. 춘계 이종성은 1901-1945년까지의 한국장로교의 신학교육은 수입신학기로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 모두 일방적, 무비판적 전달-흡수의 시기였으며 신학보다는 신앙의 시기라고 논한 바 있다.

당시 교육에 대하여 이종성은 선교사들의 일방적 교육으로 편파적이고 편협하고 포용성이나 융통성이 없는 것으로 정리했다. 이런 견해는 이후 한국인으로 해외에서 직접 공부한 이들이 귀국하여 신학논쟁을 일으킨 소위 진보주의나 신정통주의 그룹(주로 일제시대 일본이나 미국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그룹)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라고 한 바 있다.

장신대 총장을 지내고 이후 ‘온신학’ 이라는 학문적 성과를 낸 김명용박사도 “한국 장로교회 분열의 원인은 미국 장로교회의 분열에도 그 뿌리가 있다”고 진단하였으며, “소위 자유주의 신학으로 알려진 신신학에 대한 갈등과 논쟁으로 이 1953년의 기장측의 분열과 1959년의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에 개입되어 있었다”고 보았다.

한편 1938년 제 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결정하게 되지만 평양장신은 이를 거부하여 폐교를 자처한다. 당시 학생중 한분인 4회 고 조남기목사(박창환학장과 동기)등은 폐교 전 교수들의 일본어 수업을 기피하고 문학등에 심취하고 자퇴하여 10여명만 졸업했고 자신의 진로도 목회가 아닌 교사로 지망을 했다고 하신 바 있다.

한편 평소 평양장신의 선교사들의 신학교육에 불만이던 김재준등은 1940년 서울에 조선 신학원을 세우고 신학교육을 시작한다(김재준은 일본의 청산학원과 미국 웨스턴 신학교에서 “오경비판과 주전 8세기 예언운동”이란 논문으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편 평양에서도 1940년 4월, 평양장신 11회(1918년) 졸업생인 채필근이 닫혔던 평장장신을 열어, 교장이 되어 신학교육을 재개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신사참배에 끝까지 저항했던 소위 “출옥성도들”은 조선신학교와 후기 평장장신을 친일파에 의해 주도된 신학교라고 규정하고, 1946년 9월 부산에 고려신학교를 세워 신사참배에 불복종했던 과거 평장장신의 칼빈주의 정통신학을 계승한다고 명분을 내세우지만 당시 총회는 이을 인정하지 않고 1952년 37회 총회에서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하등 관계가 없다”고 하여 고신교단이 나오게 된다.

서울에 세워진 조선신학교는 1946년부터 총회의 공식인준을 받았으나, 당시 교수들의 면모도 그렇고 소위 신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친다는 물의가 끊이지 않았다(고 차관영, 이정학, 용재호, 박한용목사등이 여기 출신) 그래서 평양장신의 보수주의 신학을 계승하는 신학교를 재건하자고 1948년 6월 서울에 박형룡을 임시교장으로 하는 장로회신학교가 세워진다.

1949년 35회 총회에서는 서울의 장로회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결정했다. 1950년 36회 총회는 이미 인준된 조선신학교와 장로회 신학교를 통합하여 “하나의 총회신학교”로서 운영하기를 하고, 한국전쟁중이라 1951년 9월 감부열 선교사를 교장으로 이후 킨슬러선교사를 책임자로 대구에서 개교을 하였으나, 조선신학교측이 이를 거부하여 통합은 실패한다.

해방후 교단 분열의 원인은 신학
해방직후 평양에서는 김인준(평장신 19회 졸업생, 목사) 교장의 지도로 평양장신이라는 명맥은 유지하였으나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되고 공산정권하에서 추방되고 1947년부터 이성휘가 교장이 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중 이성휘는 순교하고 평양장신도 사라졌다고 한다.

하나의 총회신학교 통합노력이 실패하고 1952년 4월 제37회 총회에서 성경 유오설을 주장, 옹호, 선전한다는 이유로 김재준 목사 면직과 카나다 장로교 선교사 서고도의 본국 송환을 결정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로써 한국 장로교회의 첫 분열은 명백하게 신학 교육 방법의 차이 혹은 성경관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다음 해인 1953년에 기장과 예장이 분열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그러나 최근 한일장신대 이승갑교수가 저술한 책자에 의하면 교단에는 한국전쟁으로 월남한 이북세와 당시 이남에서 다소 안정적인 성장을 한 경기노회간의 알력이 있었다. 그리고 결국은 총회 패권을 위한 총대 숫자를 좌우하는 세불림에서 경기노회가 밀린다 그렇게 해서 당시 총회에서 활동하던 김종대, 유호준, 안광국, 강신명목사등의 활약으로 분열과정에서 선교사들과 많은 교회들이 통합에 남게 된다. 

그후 조선신학교는 한국 신학대학이 되었고, 총회 신학교는 1952년 10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라는 교명으로 정부의 설립인가를 받는 다. 1953년 10월 서울 남산교사에서 박형룡을 교장으로 평양장신의 신학을 계승하는 신학교육을 재개한다. 학교의 신학노선은 “성경 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한국 장로교회 보수주의 신학사상의 2대 핵심내용들로서 했다.

고신파가 신사참배 문제로 분열한 것이나, 기장과 예장이 신학교육 때문에 분열한 것이나, 또 1959년 합동측과 통합측이 WCC 가입 찬반 문제로 분열한 것도, 그 신학적 명분의 공통된 뿌리는 공통적으로 성경관에 있다고 김중은 총장은 쓰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이권과 주도권 싸움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나 사회, 교인들에게는 순수한 믿음과 신앙을 택하기 위한 것으로 포장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광나루 장신대 시대
소위 광나루시대가 시작된 1960년대 당시 초대 계일승 학장은, 장신대 교육을 “에큐메니칼(세계교회와 연대하는) 정신에 입각한 보수신학을 견지하는 것” 이라고 한바 있다. "근본주의나 진보주의라고 일컫는 자유주의나 급진적 신학에는 비판과 신중을 기하면서, 한국교회의 건전한 발전과 선교의 전진을 염두에 두는 것"이 장신대의 학풍이요 강조점이라는 것이다.

그때 입학한 장신대 15기(59기)는 정규 일반대 4년제를 졸업한 홍성현, 김종희, 김종열, 김이태와 금영균, 윤두호, 김덕재등은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재학중이었다. 장신대 역사상 처음으로 신대원 3년을 과정을 거친 세대로 이들의 자부심과 학구열은 컸지만 학교 커리큘럼이나 교수들이 이를 수용해내지 못하여 불만들이 컸다. 이후 백도웅, 계지영목사 시절에는 아예 아버지인 계 학장을 찾아가 무능한 분들은 물러가라고 한다. 그때 계일승 학장은 “무능하니 교단이 더 분열이 안되는 거다” 라는 명답을 하셨다고 한다.

장신대가 그 때만 해도 지방 신학교를 졸업하고 지역교회 목회중인 전도사들에게 교단의 목사 고비 자격증을 주는 위탁기관이었다. 지방의 4개 신학교를 졸업하고 온 이들이 1년 남짓 마물고 가는 이들을 교육시키는 것과 함께 4년제 정규대학이 된 학부생과 신대원생과 대학원 과정을 통하여 이들의 학구열을 충족시켰어야 했다. 여기서 춘계 이종성은 장신대를 신학이라는 학문의 장으로 전환시킨 분인데 우리신학은 교파를 초월하는 “복음적이고 성서적 신학”이라는 넓은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장신대의 재정의 담보자는 소위 '목연' 학생들로 숫적면에서도 신대원이나 학부생은 비교가 불가능했다. 이후 이들이 목회현장으로 나가서 노회와 총회의 주역도 되고 훗날 신학대학총연합회(신총연)으로 교단 정치세력화을 이루기도 하지만 역사적 수명을 다하고 사라져 갔다. 그리고 지금은 장신대 학부출신들이 총회적으로 크게 활약하는 시기로 보여진다. 그 정점이 류영모목사의 부총회장 당선과 임성빈목사의 동문 총장 연임이었지만 좌절을 당한다.

이종성학장의 신학적 기여와 노력은 그의 높은 학문적 탐구에서도 기인하지만 경상도라는 지역적 기반으로 장신대를 나오지 않고도 학장을 역임하고 총회장도 하게 한 것은 선배들의 통 큰 신학과 신앙의 유산이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비판이 없잖았는 데 먼져 배우고 사용하는 용어가 아무래도 서구신학 산물이기에 당시 이에 낮선 보수적 관점의 한국신학계는 이를 신정통주의 신학이라고 비판한다.

이렇게 이종성은 일본 동경신대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안수받은 목사로 이후 미국과 독일에서 공부하고 연구를 했으며 귀국후 비교적 자유로운 학풍의 연세대학교 신학과에서 가르치다가 장신대에 온 학자로써는 흔치 않은 경험의 소유자다. 그후 총회장 까지 역임하셨고 은퇴후에는 학술원을 세워운영하는 등 한국신학과 우리교단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아니하다. 

장신대는 세계적인 대학이 된다. 
그후 급증하는 장신대 지원자들로 넘치는 시기의 지도자 박창환학장 시절이나 서정운총장 시절은 두 분다 학자로써 성실함과 진지함 온기가 도는 학풍을 만든다. 그리고 사제들 간에도 우애와 사랑이 있는 시절로 회고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이후 교사 이전과 증축등으로 장신대는 큰 홍역을 겪는 다. 그러나 교회들의 성장과 이로 인한 신학지망생들의 급증으로 학생숫자나 교수들 수준은 세계에 내놓을 만한 수준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지도부의 무능을 틈타 발전적 학교 이전이라는 이슈를 갖고 이종성학장 컴백설이 나돌자 이를 반대하는 혼란을 겪는 다. 그후 맹용길, 고영수, 김중은, 장영일, 김명용총장 시대를 지난다. 그중 김명용은 장신대 신학을 주체적이고 토착적으로 ‘온신학’ 으로 많은 후배 교수들의 지지를 받지만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학이 학문이라면 도전과 비판이 없이는 발전할 수 없기에 학문적인 논쟁은 건강한 것으로 장려할 일이지 비판할 일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참고로 장신대는 건학 2세기를 맞아 지난 2002년에 장신대의 신앙과 신학 교육의 정체성을 밝히는 신학 문서를 발표한다. 이는 1920년 평양 장신 교수회가 발표한 “본교의 목적과 신경”, 1985년 교수회가 채택한 “장로회신학대학 신학성명”에 이은 역사상 3번째 문서로 소개한다

그 서문에 보면 “우리는 여기에서 신학의 전제, 개혁주의 신학 전통과 에큐메니칼 신학, 신학과 교회, 신학의 선교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 신학의 자리의 방향, 신학의 한계와 신학의 대화적 측면에 대하여 7가지 명제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는 장신대의 신학 교육을 가늠하며, 교회와 사회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결정한다.”라고 밝혔다.

1. 우리의 신학은 복음적이며 성경적이다.
2. 우리의 신학은 개혁주의적이며 에큐메니칼하다.
3. 우리의 신학은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봉사한다.
4. 우리의 신학은 선교적인 기능과 역사적, 사회적 참여의 기능을 수행한다.
5. 우리의 신학의 장은 한국이요, 아세아요, 세계이다.
6. 우리의 신학은 기술사회의 문제들(현대 과학주의와 현대 문명의 문제들)에 응답해야한다.
7. 우리의 신학은 대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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