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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열 선교사의 생애와 한국교회에 남긴 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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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2.08  00: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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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390회 학술발표회 

졍병준교수(서울장신대학교)

머리말
1. 한국 선교의 동기와 배경
2. 평양에서 결혼생활 및 선교 방향 전환
3. 평양의 선교활동
4. 장로교 ‘총회신학교’ 설립과정
5. 한국전쟁과 구호 활동
6. 에큐메니칼과 NAE 대결 구도
7. 권세열과 박창환
8. 군목 지원과 군선교
9. 선교 이양
10. 신학적 공헌
11. 은퇴
맺음말
 

머리말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권세열(權世烈, Francis Kinsler, 1904-1992)은 42년(1928-1970, 미국 체류 6년)을 한국 선교사로 살면서, 숭실전문, 평양신학교, 장로회신학교(대학) 교수, 성경구락부 운동, 한국전쟁 시기 전재민 구호와 목회자 가족 피난 및 구제, 군 선교 지원, 예장 총회(통합)로 선교사업 이양, 저술 활동과 지도자 양성 등 많은 활동을 하며 한국교회와 사회에 공헌했다.

권세열에 관한 기존의 연구는 ‘성경구락부’와 기독교교육 그리고 선교관점에서 진행되었다. 성경구락부에 관한 연구는 장금현, “프란시스와 성경구락부운동”, 「신학과 실천」 68 (2020): 527-553; 장금현. “해방 후 경북지역 성경구락부(Bible Club)의 변화: 경북 경안노회를 중심으로”. 「대학과 선교」 43 (2019): 93-127; 류은정. “한국교회 교육복지의 모판, ‘성경구락부운동’”. 「Reformation & Transformation: 개혁과 변혁」. 2017년 한국기독교교육학회 종교개혁 500주년기념 추계국제학술대회 및 정기총회(2017년 11월 18일), 180-194. 선교학적 관점의 연구는 이선이, “킨슬러가(家)의 현지인 중심적 선교”, 「선교신학」 59 (2000.8): 207-236.

이 연구는 권세열의 생애와 공헌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면서, 기존 연구가 깊이 다루지 못했던 그의 선교 동기와 배경, 한국전쟁 시기의 활동, 1950년대 총회신학교 설립과 에큐메니칼 논쟁에서 입장과 자세, 예장 총회(통합)로의 선교 이양, 지도자 양성, 신학적 공헌을 검토한다. ‘성경구락부’ 운동은 필요한 부분만 간단히 언급한다.

김득렬이 편집한 『권세열 선교사 전기: 씨를 뿌리려 나왔더니』 김득렬 편, 『권세열 선교사 전기: 씨를 뿌리려 나왔더니』(서울: 도서출판 카이로스, 2008). 는 아들 권오덕이 쓴 권세열의 생애와 가족 이야기, 권세열의 선교보고서와 편지, 김득렬의 권세열의 사역에 대한 평가, 그리고 권세열을 아는 지인들의 평가가 담겨있다. 성백룡이 쓴 “권세열 선교사의 삶과 사역”은 앞의 책을 근거로 권세열의 생애와 사역을 종합적으로 소개했다. 성백용, “권세열 선교사의 삶과 사역,” 『권세열 : 조선의 풍경』, 숭실대학교뿌리찾기위원회편(서울: 숭실대학교 지식정보처 학술정보출판팀, 2017), 107-165.

북장로회해외선교부 선교보고서 Korea Mission Report 1911~1954는 권세열의 선교보고서와 편지를 읽을 수 있고, 「기독공보」는 권세열의 군 선교활동과 선교 이양 과정에 관련된 일차자료를 제공한다. 대만의 역사학자 Kai-yin Allison Haga의 박사 논문, “한국전쟁에서 간과된 차원: 한국 민족주의, 반식민주의, 한국전쟁의 확대 과정에서 기독교와 미국 선교사의 역할, 1884~1953”은 미국 선교사들의 구호, 군목 활동, 유엔군의 북진 당시 북한방문과 목사 가족 철수, 포로선교 등을 다루며 권세열의 활동을 언급했다. Haga, Kai Yin Allison, “An overlooked dimension of the Korean War: The role of Christianity and American missionaries in the rise of Korean nationalism, anti-colonialism, and eventual civil war, 1884-1953,” (Ph. D. dissertation of The College of William and Mary in Virginia, 2007).

1. 한국 선교의 동기와 배경

권세열은 1904년 1월 13일 미국 필라델피아 저먼타운에서 복음주의적 장로교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독일 배경을 가진 루터 킨슬러(Arthur Rutter Kinsler)였고 모친은 스코틀랜드 배경을 가진 베르타 캠벨 킨슬러(Bertha Campbell Kinsler)였다. 캠벨 가정은 여러 명의 한국 선교사를 배출했다. 권세열의 사촌 감무열(Edwin L. Campbell, 사역 1914-1933)은 평양 숭실에서 학생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농업과 목공 등 전문 분야를 가르쳤고 한국 YMCA 농촌운동을 지원했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샌더스 캠벨(Elizabeth Sanders Campbell, 사역 1913-1933)은 선천 신성학교에서 사역했다. 감부열과 헬렌(Archibald Campbell and Helen, 사역 1916-1960)은 강계(1916-1940)에서 사역했고, 다시 한국에 와서 계명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냈다. 소열도(T. Stanley Soltau 사역 1914-1939)와 매리 캠벨 솔토(Mary Campbell Soltau)는 선천과 강계에서 사역하면서 1921년 만주 신빈 선교부를 개척했고, 질병으로 청주로 이전했다. 그의 쌍둥이 형제 소일도(David Soltau, 사역 1921-1929)와 그레이스(Grace)는 평양에서 교육 선교사로 일했다. 권세열 부부가 한국에 왔을 때 2명의 누이를 포함에서 이미 10명의 가족이 한국에 있었다. 권오덕, “프랜시스와 숭실대학,” 미간행원고, n.d.; 이지하, 『소일도와 소열도: 흔적과 표적, 기쁨으로 따른 길』(서울: 숭실대학교 출판부, 2018), 12-13.

권세열은 경건한 신앙훈련을 받으며 성장해서 지성적 특징을 갖추었다. 그는 15세가 되던 1919년 두 명의 누나와 형과 함께 뉴욕의 스토니브룩(Stony Brook)에서 열린 청년 하기 수양회에 참여했고 네 명이 동시에 선교 사역에 헌신하겠다고 서원했다. 권세열과 두 누나는 한국 선교사가 되었고 권수라(Marian Kinsler, 權水羅, 1894-1985)은 1922~1942년 서울에서 사역했다. 여성사경회, 피어선 성경학교, 개인적 모임에서 성경 과목을 가르쳤다. 그는 1925~1935년 태화여자관(후에 태화기독교사회관)에서 사역했고, 1935년 태화여자관과의 관계를 단절한 후 모든 성경공부는 피어선 성경학교에서 진행했다. 그때는 연지동 독신 여성의 집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권신라(Helen Kinsler, 權信羅, 1895-1975)은 1923~1930년 대구에서 사역했다. 전도부인과 함께 여러 교회를 방문해서 성경을 가르치고 여성을 훈련했으며, 대구 신명여자고등학교에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다.

형은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에서 목사가 되었다. 권세열은 1925년에 메리빌 대학(Maryville College)을 졸업했고 프린스턴 신학교(1926-1928)에서 공부했다. 그 당시 프린스턴에는 그래샴 메첸(John Grasham Machen)이 신약 교수(1909-1929)로 재직하고 있었다. 권세열은 ‘현대주의-근본주의 논쟁’의 마지막 부분을 목격했으나 그는 교리 논쟁보다는 선교에 열정이 있는 개혁주의 복음주의자였다. 그가 공부하던 당시 프린스턴에서는 윤하영(1924-1927 대학원 1928-1929) 윤하영(1889-1956)은 1929년 귀국하여 신의주 제1교회 담임 목사가 되었고, 1939년 제38회 장로교총회 총회장을 지냈다. 1945년 한경직과 함께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창당했고 10월 월남했다. 미군정 시기 충청북도 지사를 지냈고, 한국전쟁 당시 미군 공보관으로 활동했다. 1945년 안광국은 초대 보은군수에 당선되었고, 윤하영이 그를 충청도 후생국장으로 임명했다.
과 한경직(1927-1929), 한경직의 동기 옥호열(Harold Voelkel)이 재학하고 있었다. 네 사람은 한국에서 긴밀한 동문 관계를 가지고 활동했다.

1928년 초 숭실전문의 4대 교장으로 내정된 윤산온(George McCune, 1873-1941)은 선교 특강을 하기 위해 프린스턴 신학교를 방문했다. 윤산온은 1921~1927년 사우스다코타 휴런 대학에서 학장을 지냈다.
윤산온은 숭실전문과 평양신학교의 졸업생들이 선교할 수 있도록 만주와 몽골에 선교부를 개척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고, 권세열은 이러한 비전에 설득되어 한국 선교를 자원했다. 윤산온은 1914년에도 프린스턴 신학교를 방문해서 만주 요령의 신빈(新賓)의 한국인 선교를 위해서 소열도(T. Stanley Soltau)를 선발한 경험이 있었다.

2. 평양에서 결혼생활 및 선교 방향 전환

권세열은 1928년 5월 선교사 임명을 받고 10월 4일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두 달을 서울에 머물면서 길진경에게 한국어를 배웠고 평양으로 와서 윤산온의 집에 거주했다. 그해 성탄절에 만주 선교사 조나단 고포스(Jonathan Goforth)를 방문했고 하얼빈까지 여행했고, 그 후 고포스 팀과 함께 몽골 국경도시를 방문했다. Letter to The Third Presbyterian Church, 9 January 1929. 조나단 고포스는 캐나다 토론토 낙스 대학 출신의 선교사로 1907년 한국의 부흥 운동을 목격했고 그 소식을 만주에 전했다.
1930년 9월 권세열과 도로시 우드러프(Miss Dorothy Woodruff, 한국명 권도희)는 윤산온의 주례로 결혼했다. 1931년 1월 권세열 부부는 사촌 감부열이 사역하는 강계의 성경학교에서 창세기와 로마서를 가르쳤다. 권세열은 2월에 만주에서 한인 선교를 하는 쿡(Welling T. Cook)과 로이드 핸더슨(Lloyd P. Henderson)과 함께 북만주에 가서 애국적인 한인교회들을 방문했고, 300명 이상의 교인들과 사경회를 가졌다. Report of Francis Kinsler 1931. 『씨를 뿌리러 나갔더니』, 123쪽 한국어 번역은 권세열이 북만주에서 “체포되어 강제 추방” 당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번역 오류다.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은 만주 사변을 일으켰고 1932년 1월까지 만주 전역을 점령했다. 권세열 부부는 1931년 성탄절 연휴부터 6주 동안 신빈 남자성경학교에서 35명의 학생에 성경 과목을 가르쳤다. Annual Report of Francis Kinsler 1932. 성백용은 “1932년 크리스마스 휴가” 때라고 썼으나, 그때는 권세열이 만주 선교를 포기한 시점이다.
1932년 권세열은 길림성 사평가(四平街)에서 기차를 바꿔 타는 중에 일본 관헌에 의해 미국 스파이로 의심을 받아 소지품 검사를 받았다. 1932년 10월 16일 신빈의 핸더슨은 일본군에 의해 강제 이주되는 한국인들과 동행하다가 매복 중인 중국군 혹은 마적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Letter to Dear Friends, 25 October 1932. 소열도는 그것이 일본군의 범죄행위였다고 증언했다. T. Stanley Soltau, Memories Missionary to Korea (The Moffett Korea Collection: Princeton Theological Theminary, n.d.), 17.
그 후 북장로회 선교부는 신빈 선교기지 폐쇄를 고려하게 된다. Harry A. Rhodes, ed., History of The Korean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Volume I 1884-1934, (Chosen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 A., 1934), 382.
권세열은 이로써 만주와 몽골 선교의 꿈을 접었다. “프랜시스의 자서전적 스케치,” 『씨를 뿌리러 나갔더니』, 54.

3. 평양의 선교활동

평양 양관(洋館)의 근처 서성리(현재 보통문동) 일대, 서편 강둑에는 빈민들이 토굴을 파고 살았고 그곳의 아이들은 방치되었다. 1929년 2월 어느 밤 권세열은 길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소년 6명을 데려다가 평양 시내 기독교 서점 광문서관 2층에 화덕 불을 피우고 잠을 재웠다. 아이들이 계속 찾아왔고 그 숫자도 늘어났다. 권세열은 이 모임을 ‘개척구락부’(Pioneer Club)라고 칭했다. 1934년 일본인 교육 조사관은 이것을 공산주의 활동으로 오해했다가 성경을 가르치는 모임이라는 말을 듣고 ‘성경구락부’로 칭하라고 조언했다. 1981년 75세의 권세열은 인터뷰에서 말한다.

“그 당시 한국 아동의 절반이 공부를 못했어요, 그 추운 겨울에 덜덜 떨며 거리를 방황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었어요.” “교육방침은 누가복음 2장 52절로 소년 시절의 예수님의 모습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를 본받자는 생각이지요. 지육, 체육, 종교, 봉사 이 4가지 정신에 입각한 전인교육이 바로 성경구락부 운동의 기본 정신입니다.” “韓國은 제2의 故鄕” 「한국기독공보」 (1981.5.23.), 6.

권세열은 처음에는 숭실전문 학생들에게 ‘노동장학금’을 지급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했는데, 읽기, 쓰기, 성경공부반이 생겨났다. 그 후에 평양장로회신학교, 여자고등성경학교, 숭실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성경구락부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당시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통해 교사로 일했던 학생들의 명단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방지일, 『야사도 정사로』(선교문화사, 2001), 70, 김학수, “귀한 배움, 성경구락부에서의 3년과 나의 생애,” 『씨를 뿌리러 나갔더니』, 271. 김찬호, “권세열 목사의 성경구락부 운동과 그 역사적 고찰,” 『씨를 뿌리러 나갔더니』, 303-304.

방지일, 배민수, 길진경, 송영길, 박태기, 이유택, 신후식, 김진수, 강신명, 이창철, 권택희
윤종묵, 김희선, 김양선, 김치선, 안광국, 문한근, 김광현, 김성주, 탁상신, 박윤삼, 윤명식
박창목, 황선희, 김세연, 윤정식, 이성주, 최영일, 권태일, 채기연, 문덕준

이들은 해방 이후 권세열과 관계를 계속 이어가며 한국교회에 중요한 인물이 되었는데, 1959년 장로교 분열 과정에서 절대다수가 에큐메니칼 진영을 택한다.  권세열은 숭실전문에서 영문학과 성경을, 평양신학교에서 신약을 가르쳤고, 아울러 평서노회 구역담당 선교사로 섬겼는데, 1933년 평서노회 기독면려청년회에서 요한복음 전체를 강론했다. 이 시기 평양에서 도로시 헬렌(Dorothy Hellen, 1932)과 아서 우드러프(Arthur Woodruff, 권오덕, 1934)가 태어났고, 안식년 중 프린스턴에서 프랜시스 로스(Francis Ross, 1935)가 태어났다. 로스 킨슬러(Dr. Ross Kinsler)는 한국 전쟁 중 한국을 떠나 휘튼 대학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했고 에딘버러 대학에서 신약학(Ph.D.)을 전공했다. 그는 과테말라의 선교사로 교육 사업에 힘썼다. 그는 한국에서 “성경구락부”가 대안 교육으로 성공한 것을 인식했고, 고비용이 드는 기존의 신학교육 대신 집에서 공부하는 교재를 개발하고 현장 교회의 자생적 리더를 찾아가서 교육하는 “확장신학교육”(Theological Education by Extension)이라는 대안 신학교육 모델을 개발해서 라틴아메리카에 적용했다. 그 후 제네바 세계교회협의회 교육국에서 근무했다. 로스 킨슬러의 Inductive Study of the Book of Mark: The Gospel of Jesus Christ the Son of God은 『마가복음의 귀납적 연구』(서울: 보이스사, 1985)로 번역 출판되었다.

권세열은 평양신학교 교수 사역을 위해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마쳤다.  1935년 12월 13일 북장로교 선교부 실행위원회는 윤산온의 집에 모여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하기로 결의했고, 윤산온은 교장직에서 파면되어 1936년 3월 21일 추방되었다. 1936년 권세열은 평양으로 돌아와 이사야, 요한복음, 헬라어를 가르쳤다. 1936년 11월 「신학지남」에 “이른 아침 영적교제와 그 실제”라는 글을 기고했는데, 영성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38년 3월 4일 숭실전문과 성경구락부는 자진 폐교했고, 평양신학교도 수업을 열지 않았다. 이 당시 전국적으로 성경구락부에 참석하는 청소년은 5000명이 넘어서고 있었다. 권세열, “성경구락부 기독교교육원리,” 『씨를 뿌리러 나갔더니』, 105.
그 후 숭실전문의 빈 교실에서 숭신(崇信) 고등성경학교를 운영했으나 일제의 강요로 폐쇄되었다. 권세열은 비밀리에 학생들과 성경공부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 역시 군경에 탐지되어 해체되었다. 이태준(동교동교회 원로)은 평양 숭신 고등성경학교에서 권세열을 만나 성경을 공부했고, 학교가 폐쇄된 후 월남해서 조선신학교에서 공부했다. “권서인의 전도받고 목사가 되기까지,” 「한국기독공보」 (1989.5.27.), 5.

권세열은 1941년 4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권세열 부부는 1942~1948년 뉴욕 롱아일랜드 이스트햄턴 장로교회(East Hampton)에서 목회를 했고, 1948년 7월 한국 선교사로 재임명을 받았다.

4. 장로교 ‘총회신학교’ 설립과정

1945~1946년 입국한 선교사들은 미군정의 필요와 요청에 협력하면서 사역했다. 안종철, 『미국 선교사와 한미관계』(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61-267.
1948년 1월 북장로교 한국 선교부가 조직되었고, 1948년 9월 권세열 부부는 서울에 도착했다. 권세열의 주위로 월남한 이북기독교인들이 모여들었다. 1949년 권세열은 이북신도대표회(회장: 한경직 목사) 협동총무로 추대되었다. 이북신도대표위원회 문집간행위원회, 『이북신도대표회 문집』(이북신도대표위원회편집위원회, 1984), 32-34. 윤정란, “한국전쟁 구호물자와 서북출신 월남기독교인들의 세력화,” 「숭실사학」 34 (2015): 331에서 재인용.

그의 선교 활동의 대부분은 북장로교 선교부와 이북신도대표회를 연결해 돕는 것이었다. 장금현, “프란시스 』(Francis Kinsler)와 성경구락부(Bible Club) 운동,” 「신학과 실천」 68 (2020): 528.
권세열은 1949년부터 이북신도회와 선교지부를 통해 성경구락부 운동을 재건했다. 한국전쟁 시기와 그 이후에 성경구락부 운동은 전국적으로 대안 교육으로 확대되었다.

〈표1〉 성경구락부 통계와 지역 비율 김찬호, “권세열 목사의 성경구락부 운동과 그 역사적 고찰,” 『씨를 뿌리러 나갔더니』, 305-306.

   
 

성경구락부가 가장 활발한 지역은 서울과 경상지역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월남 피난민의 확대와 긴밀하게 연관되었다. 1959년 호남지역 성경구락부 비율이 늘어나는 것은 월남 피난민이 정착한 제주지역을 포함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 초등의무교육이 정착되면서 초등부 성경구락부 학생 수가 급감했다. 총회신학교 신학생들이 성경구락부의 교사로서 교육에 참여했고 교회를 개척했다.
1954년 4월 전쟁이 끝나고 이북 출신 목사들은 북장로교 재한선교부에 고문을 추천해 달라고 했고 선교부는 권세열을 추천했다. Harry A. Rhodes, and Archibald Campbell eds.,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A. Volume II 1935-1959 (Commission on Ecumenical Mission and Relations, Unt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1965), 211.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과거 북한에서 선교했던 선교사를 적극적으로 의존했다. 또한 권세열처럼 오랫동안 이북에 살았던 선교사들은 실향민의 고통을 공감했다.

권세열은 신학교 갈등에 말려들었다. 해방 직후 장로교 남부총회(1946.6.12. 승동교회)는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으로 결정했고, 경남노회의 한상동과 박윤선은 고려신학교(1946.9.20)를 설립했다. 1948년 5월 총회 신학대책위원회는 ‘장로회신학교’ 개교를 결정했고, 박형룡은 남산 조선신궁 별관에서 신학교를 개교했다(1948.6.9). 북장로교 선교부와 한국선교 실행위원회는 권세열에게 “한동안 장로회신학교에서 가르치지 말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장로회신학교 지도부와 학생 대표들은 선교사 중 유일하게 권세열에게 신학교육에 조속히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른 한편, 권세열은 조선신학교 지도자들로부터 불편한 방식으로 그들의 입장을 전달받았다. Letter to Dr. John Smith, 30 December 1948.

1949년 4월 제35회 총회(새문안교회)는 51대 36으로 장로회신학교를 총회신학교로 인준했다. 여기서 캐나다 선교사 서고도(Scott)가 성경에는 ‘축자영감설’이 없다고 하자, 권세열은 그것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김득렬, “전설적 선교사 권세열 박사,” 『씨를 뿌리려 나왔더니』 , 219.
권세열이 축자영감성 그 자체를 옹호하려고 했던 것보다는 조선신학교의 신학 방향에 대해 반대한 것으로 보인다.
1948년 9월 권세열은 영락교회 교육관에서 요한일서 1장 4절을 본문으로 교수 취임 공개신학강연을 했다. 그는 ‘가현설’을 비판하고 말씀이 육신이 된 사실을 강조한다. 권세열의 신학 사상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는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었다. 따라서 말씀의 진리성,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순종과 헌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강조했다.

1950년 4월 제36회 총회(대구제일교회)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인가를 취소하고 총회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교장에 감부열, 교수에 박형룡, 계일승, 권세열, 김치선, 명신홍을 임명했다. 권세열은 조선신학교의 방향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박형룡의 신학에 동의한 것도 아니었다. 권세열은 어느 정도 개방성이 있었고 신약학의 새로운 흐름을 알고 있었으나 한국장로교회의 보수성을 생각해서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박형룡은 권세열의 가르침을 경계했다. 박창환, “장로회신학대학교와 권세열 선교사” 『씨를 뿌리려 나왔더니』 , 332.

권세열은 선교부 동아시아 총무 존 스미스에게 보낸 1950년 12월 9일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믿어주십시오. 저는 본부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폭넓은 범위를 가진 하나의 신학교를 통해 모든 그룹을 함께 묶어서 교회의 일치를 이루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총회, 서울 노회(역주: 경기노회), 서울, 대구, 부산, 마산, 땅끝 지역에 있는 많은 목사 사이에 이 뜻을 전했습니다. 저는 의심을 받았고 심지어는 극단적 보수 그룹은 제 방식에 대해 거부했습니다. 풀턴 박사는 그의 선교부의 원로선교사 일부가 저에게 크게 실망했다는 것을 알고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그룹들이 하나의 연합적인 교회신학교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일치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 저의 큰 실망입니다. 그 경우에 장로회신학교를 지지하는 다수 그룹이 기독교 진리를 증거하는 가장 좋은 희망으로 남아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제 제가 아내와 네드(역주: 안두화, Edward Andams) 외에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저의 “신학적 확신”은 제가 발견한 장로회신학교 지도자들의 확신과는 아주 다릅니다. 보수 그룹들은 교리, 합작, 남북의 차이에 대해 냉정하게 논쟁하면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살아있는 즐거운 신앙개념에서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Letter to Dr. John Smith, 9 December 1950.

이 편지를 통해 볼 때, 북장로교 선교부와 선교사들은 초기에는 비교적 포용적인 신학교를 운영해서 다양한 입장을 조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장로교 선교사들과 박형룡 그룹은 캐나다 연합선교회와 조선신학교를 수용할 생각이 없었다. 또한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미국 정통장로교회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고려신학교를 극우적 입장으로 봤다. 조선신학교와 고려신학교를 포용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다수파의 지지를 받는 박형룡의 장로회신학교를 중심으로 신학교육에 협조한다는 입장을 정리했다고 보인다.

1951년 5월 부산진 교회에서 총회신학교가 개학하자 275명의 학생이 몰려왔다. Letter to Dear Friends, 16 July 1951, 『씨를 뿌리려 나왔더니』, 154.
1951년 5월 24일 속개된 총회는 고려신학교 출신자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그해 9월 총회신학교는 대구 서문교회당에서 개교했다. 500여 명의 학생 중 3/4이 실향민이었다.
1952년 1월 18일 권세열은 안식년 중인 안두화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수파가 고려파와 조신파와 함께 신앙생활 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고 설명하면서, 이런 상황에서는 과거 평양신학교 전통을 옹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즉, 교회가 양극단으로 갈라지지 않도록 다수파에게 명분을 주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Letter to Ned, 18 January 1952.
권세열은 한경직과 윤하영으로부터 새로운 총회신학교가 다수파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조언을 들었다.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박형룡보다 한경직과 윤하영과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52년 봄 감부열 교장이 안식년을 떠나자, 학감 겸 교수였던 권세열은 교장 대행직을 수행하며 교육과 행정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권세열은 1951~1952년에 북장로교 재한선교사회 대표였고 행정책임을 맡고 있었다. 안두화는 1951-1952년을 제외하고, 1948-1957년까지 재한 선교사회를 대표했다.

1952년 대구 총회에서 무지역 이북 노회를 구성했다. 여기서 월남한 이북 목사들이 총대의 다수표를 확보했다. 그 결과 김재준의 목사직을 박탈하고 조선신학교 졸업생에게 목사 자격을 주지 않는다는 결정을 했다. 1953년 총회는 그 결정을 재확인했다. 1953년 12월 안식년 중인 권세열은 미국에서 조선신학교의 김정준이 자신을 비난하는 글을 읽게 되었고, 존 스미스에게 해명하는 편지를 썼다. 요지는 서고도 선교사가 권세열에게 모욕을 당했고 권세열과 디캠프(DeCamp)가 근본주의 라인의 신학교를 설립하도록 총회의 결정을 밀었다는 것이었다. 권세열은 총회의 결정이 단순히 성서무오설 때문만은 아니며, 자신이 조선신학교를 배제하려 했다는 것은 사실과 반대라고 답한다. Letter to Dr John Smith, 7 December 1953.
조선신학교 측은 총회의 그러한 결정 배후에 권세열이 있다고 확신한 듯하다.

5. 한국전쟁과 구호 활동

6.25 전쟁이 일어날 때,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대천 선교부 수양관에서 제58회 연례회의 겸 가족 수양회로 80명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26일에 대구와 부산을 거쳐 후쿠오카로 떠났다. 권세열, 안두화, 감부열, 언더우드 형제는 한국에 남았다. 안두화는 대구 은행에서 수 십만원의 돈을 인출 해서 비상구호, 난민 목사들의 전도비, 구호 인력 비용에 사용했다.
권세열은 1950년 7월 6일 대구에서 유엔군의 통역을 맡았고, 허일(Harry J. Hill)은 포로심문과 미군의 예배 인도를 맡았다. Letter From Rev. Harry Hill, 22 August 1950. Rhodes and Campbell, ibid., 339-340
권세열과 인돈(William Linton)은 또한 미군 예배 인도를 자원했다. 그 결과 선교사들은 미군으로부터 비공식적인 지원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들의 활동은 미군을 위한 통역과 예배, 포로심문 통역과 포로 전도, 전재민 구제 등에서 이뤄졌다. 전쟁 직후 3개월간 대규모 해외원조가 이뤄지지 않을 때 선교사들의 구호는 아주 소중했다. 특별히 그들은 한국인 목사 가족을 피난시키고, 부산에 구호 본부를 설치했고, 기독교세계봉사회(CWS: Church World Service)의 구호품을 받아 3개월 동안 약 6만여 명의 피난민을 구호했다. Letter to Dr. John Smith, 5 October 1950.

7월 15일 대전이 함락되기 직전까지 안두화는 대전으로 보내는 구호품의 책임을 맡았다. 대구로 가는 구호품은 권세열의 책임하에 전달되었다. 구호 차량과 구호품은 군인들에게 징발되기 쉬웠기 때문에 늘 선교사가 동행했다. 안두화, 감부열, 허일, 권세열 등은 대구 팔공산 동쪽 자락에 300~400명의 목사 가족들을 꾸준하게 구호했다.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고 1950년 8월 초 인민군의 대구 포격이 시작되자, 선교사들은 경주시 감포리에 학교 건물을 교섭해서 목사 가족을 매일 60-80명씩 이주시켰다. Letter from Edward Adams, 9 August 1950, Rhodes and Campbell, ibid., 335.
안두화는 헨리 아펜젤러가 한국 사무총장으로 부임하는 1951년 2월까지 6개월 동안 CWS의 책임자로 일했고 그 후에도 CWS 한국위원회 회장 자격으로 구호품을 확보했다. Haga, Kai Yin Allison, “An overlooked dimension of the Korean War,” 351, 윤정란, “한국전쟁 구호물자와 서북출신 월남기독교인들의 세력화,” 318-319.

1950년 10월 25일, 민간 군목 윌리암 쇼(감리교)와 옥호열, 4명의 민간인 선교사 권세열, 안두화, 감부열, 허일, 5명의 한국인 목사 윤하영, 한경직, 이인식, 김양선, 유호준은 시찰단을 형성해서 평양에 들어갔고, 교회 복구사업을 했으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후퇴했다. 10월 29일 서문밖교회 예배에서 김양선은 강제노동소에서 탈출한 형 김희선과 그의 아들 김광수를 만났다. 김희선은 제주도 성경구락부 책임자가 되었다.
권세열은 서울로 돌아와서 선교사 동료들과 함께 다시 서울이 함락될 때 이북 출신 목사와 가족의 생명이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대피시킬 계획을 세웠다. 당시 민간인은 걸어서 한강의 군사 다리를 건널 수 없었다. Harry A. Rhodes, and Archibald Campbell eds.,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A. Volume II 1935-1959 (Seoul: 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Department of Education, 1984), 44.

권세열은 우선 명단을 작성했고, 12월 8일부터 세 대의 선교부 트럭을 이용해서 그들을 대구로 피난시켰다. 그들에게 가족당 한달 생활비 5만원(미화 20불)을 제공했다. 직접 데려갈 수 없는 사람들은 미군과 교섭해서 미군 화물열차를 탈 수 있는 신분증을 발급했다. Letter to Dear Friends, 9 December 1950, Rhodes and Campbell, ibid., 45. 필립스, “권세열 선교사와 한국전쟁,” 『씨를 뿌리려 나왔더니』, 350.
권세열과 함께 차량을 운전한 선교사는 연희전문의 강사였던 제임스 필립(James M Phillips) 제임스 필립스는 프린스톤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1949년에 연희전문 강사로 입국했다. 1952년 한국의 경험에서 소명을 느끼고 예일대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라투렛과 함께 역사를 공부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동경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로 일했다.
http://www.internationalbulletin.org/issues/2012-04/2012-04-184-editors.pdf
과 레이 프로스트(Ray Prost)였다. 전쟁이 났을 때 권세열은 기독교박물관(관장 김양선)의 소장품의 안전을 위해 제5공군을 통해 미국 연합장로교 선교본부에 운반해 보전하게 했고, 또 미 해군 함정운항을 요청해서 2만 명의 기독교인과 1천 명의 교역자를 거제도와 제주도로 피난하도록 도왔다. 김광수, “그리스도의 빛을 그대로 반사하라,” 『씨를 뿌리려 나왔더니』, 398.
1951년 3월 선교사들은 폐허가 된 서울로 돌아왔다. 그들은 한국교회 지도자 소수와 함께 권세열의 인도로 남산에서 부활절 새벽예배를 드렸다.

6. 에큐메니칼과 NAE 대결 구도

1953년 6월 권세열 부부는 안식년을 떠났다. 감부열이 총회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한 후 총회는 박형룡을 교장으로 임명했고, 10월에 교사를 남산으로 옮겼다. 권세열은 1954년에 모교 메리빌 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왔다. 영락교회는 9월 30일에 권세열 박사 교수 취임식을 마련했고 약 1,000여 명의 교역자와 선교사가 참석했다. 이미 총회신학교 교수였던 권세열을 위해 영락교회가 중심이 되어 학위 취득 축하가 아닌 교수 취임식을 행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다른 한편, 권세열의 안식년 중 교단 내 원로 중진급 목사들이 권세열 선교사가 돌아오지 못하도록 미국장로교 본부에 투서한 일이 있었다. 당시 총회신학교 학우회 회장 김소영(전 NCCK 총무)은 학우회 임원회를 소집해서 투서자를 폭로하려고 시도했다. 김소영, “내가 만난 권세열 박사,” 『씨를 뿌리러 나왔더니』, 311-312.

   
   
 

위의 도표는 1950년대의 예수교장로회 총회 임원들의 명단으로 당시 교권의 지형도를 잘 보여준다. 1952년에 복음주의협의회(NAE)의 한국지부가 결성되었고, 박형룡이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NAE는 교단 내부에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1953-1955년 총회에서 에큐메니칼 측의 이원영, 한경직, 안광국, 강인구 등은 NAE가 주도하는 교권 구조에서 총회 임원으로 부상했다. 1954년 미국 에반스턴 제2차 WCC 총회(8.15-31)를 전후로 예장 안에 에큐메니칼 논쟁이 시작되었다. 1954년 4월 예장 총회 개회 설교에서 ‘에큐메니칼’을 반대했고, WCC 총회 참석자에게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할 것을 지시하기로 결의했다. NAE의 총무 출신 조동진에 의하면 그해 7월 북장로교 동아시아 선교부 총무 존 스미스가 내한해서 비밀리에 실행위원회로 모여 에큐메니칼 선교 방향을 결정했다. 조동진, “에큐메니칼교회의방향①,” 「기독공보」(1956.10.22.), 1.
1954년 총회는 신학교 난립과 사조직화를 막기 위해 총회야간신학교(현 서울장신대학교과 칼빈신학교의 전신)를 설립하기로 하고, 사적 동인지였던 「기독공보」를 총회 기관지로 흡수했다. 종교교육부 유호준 총무는 안두화에게 100만원을 지원받아 운영권을 인수했다. 이런 조치가 한경직, 안광국, 유호준 등 에큐메니칼 측의 리더십을 통해 이뤄졌다. 정병준, “「한국기독공보」의 역사, 1946-1979,” 「한국교회사학회지」 56 (2020): 265-267.

1954년 권세열의 총회신학교 복귀를 막으려는 세력과 그것을 환영하고 지지하는 세력은 바로 에큐메니칼 측과 NAE 측의 갈등 구조에서 이해될 수 있다.   NAE 측은 1956년 총회에서 미국 여행 중이던 이대영을 불러들여 총회장에 당선시킬 정도로 조직력과 세력이 막강했다. 이때 NAE 측의 핵심인 대구의 박병훈과 광주의 정규오는 총회 임원으로 부상했다. 박병훈은 1962년 11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호헌을 설립했고, 정규오는 197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보수를 설립했고, 1996년 개혁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박병훈과 김윤찬은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의 경제적 지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58년 박형룡은 재정 스캔들 이후 채플 시간에 WCC, 에큐메니칼은 용공 단체이고 모든 교수가 그것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신학교를 흔드는 세력과 싸워 이기도록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윤국, 한태동, 박창환 등 젊은 교수들은 박형룡의 태도에 분노했고 김윤국과 박창환은 수업을 거부했다. 김윤국, “신학 교수 권세열 선교사” 『씨를 뿌리러 나갔더니』, 315-319.
이로 인해 김윤국은 교수 해임의 위기에 봉착했다. 권세열은 북장로교 재한선교사회 대표 겸 총회신학교 실행 이사의 자격으로 김윤국의 입장을 경청했고, 실행이사회를 열어 박형룡 교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안두화와 노진현에게 임시 운영을 맡기도록 했다(1958년 3월 7일). 이로 인해 박형룡과 권세열의 친분은 완전히 깨졌다. 박형룡은 「신학지남」 118권(1958.6)에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리와 목적”을 기고해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자유주의의 지도하”에서 “세계 단일교회의 구성을 최종목표로 한다”라고 주장했다. 권세열은 같은 호에 “에큐메니칼 운동 약사”를 기고했다.

1959년 9월 제43회 대전 총회가 개최될 당시 NAE 측이 총회 임원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이 정치적으로 급부상하는 힘은 신학교로부터 나왔다. 총회신학교 교장은 박형룡, 대한신학교 교장은 김치선, 부산, 대구, 광주의 신학교 교장은 노진현, 박병훈, 김재석인데 이들은 NAE 측이었다. 정병준 편저, 『강신명 목사의 생애와 사상』(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6), 252-253.
신학교는 보수 신학교육, 목사 양성, 재정 확보를 통해 교권을 장악하는 통로였다. 따라서 박형룡의 교장직 실각은 단순히 보수신학을 수호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 갈등 과정에서 권세열은 에큐메니칼 노선에 서 있었다.  

권세열은 해방 이전에 평양에서 많은 학생을 가르쳤다. 특히 성경구락부 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한국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많은 지도자가 실종되거나 죽었기 때문에 북장로교 선교부는 매년 5~6명의 한국인 지도자를 선발해서 북한 복구자금에서 장학금을 마련하여 유학을 보냈다. 그중 권세열은 총회신학교 강사 박창환과 김윤국을 추천했고 이들은 1952년 9월에 유학을 떠났다. Letter to Dr. John Smith, 30 November 1951.
권세열의 추천으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했던 사람은 박창목(1949-1951, 서울장신대교수) 박창목의 둘째 딸 박미희 목사와 전화 인터뷰 2021년 2월 4일 오후 9시 30분
, 강신명(1953-1954, 서울장신대학교 제2대교장), 김동수(1959-1960, 성광), 김용준(1965-1966, 수송), 박창환(1966-1967) 등이 있다. 또한 권세열은 김규당(1952-1953, 총회야간신학교 초대 교장)의 콜럼비아 대학 유학을 지원했다. Letter to Friends, 12 June 1952.
이들은 1969년에 예장 통합이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으로 복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병준, “1960년대 예장 교단연합운동과 통합교단의 WCC복귀” 「한국교회사학회지」 45 (2012): 314-317.

7. 권세열과 박창환

박창환은 남산 장로회신학교 1회 졸업생(1948.7.9.)으로 졸업과 동시에 어학 전임강사가 되었다. 그때부터 권세열과 박창환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1960년 권세열은 미국 연합장로교 선교부와 선교사들과 협의해 광장동에 18,000평의 대지를 장로회신학대학교 부지로 매입하고 본관 기숙사 교수 사택 4동을 건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당시 박창환은 분실된 총회신학교 학적부의 행방에 대한 소식을 듣고 17만환의 사채를 얻어 그것을 구입했다. 박창환은 오랫동안 사채 이자를 지급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권세열은 미화 1,000불을 가져와서 일단 사채 원금을 상환하도록 도왔다. 2년 후 박창환은 동교동 자택을 매각해서 1,000불을 상환했다.

또한 1961년 신약 새번역에 참여한 박창환은 필화 사건에 휘말렸다. 박창환, “聖書改譯의 必要性: 現代에 살아있는 『말씀』의 바른 傳達을 위하여,” 「기독공보」(1961.7.31.), 2.
예수님의 언사를 현대적 감각으로 표현한 것이 원인이었다. 합동에서는 통합이 신신학으로 성경을 고친다고 공격했다. 1961년 통합 총회에서 신신학 문제를 일으킨 신학자를 조사하라는 요구가 나오자, 이사회는 박창환의 강의를 정지키셨다. 권세열과 김윤국을 포함한 5인의 교수위원회는 전혀 문제가 없는 사항이므로 이사회의 징계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계일승 학장은 박창환을 희생시키는 선택을 했다. 저항하던 학생 대표 고환규는 제적되었다. 박창환은 1년 후 복권되었으나 김윤국은 교단과 신학교의 불합리하고 이기적인 처사에 분노해 학교를 사임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권세열은 박창환과 김윤국 등 젊은 교수와 그 장래를 아끼는 사람이었다. 권세열은 1966년에 강의 때문에 공부할 기회를 놓친 박창환을 위해 프린스턴 신학교에 유학하도록 알선했고, 귀국하는 그를 위해 미국 워싱톤주 휘트워스(Whitworth) 장로교대학에서 성경번역과 신약교과서 출판의 공로를 인정해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1967)를 받도록 주선했다.

* 이 원고는 지난 2월 6일 한국기독교역사학회에서 발표된 원고이며 각주는 다음 편에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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