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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 뉴스 관서지방 탐방기(4)4) 京都(쿄토) 동지사 대학과 쿄토 동산교회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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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5.02  21:2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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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장 뉴스 관서지방 탐방기(4)

유재무 목사(전 일본선교사)

글 싣는 순서
1) 예장뉴스 간사이 여행
2) 關西(관사이) 지방 그리고 한인교회
3) KCC(Korea Christian center) 역사와 선교적인 비젼
4) 京都(쿄토) 동지사 대학과 쿄토 동산교회
5)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생성과 역사 그리고 과제
6) 한국교회의 일본선교와 선교사 및 문제점
7) 일본인과 한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경도의 도시샤(동지사)대학은 「최고의 지식을 함께 추구해 나가자」가 모토이다.  설립자 니이지마 죠는 서양의 신식교육을 받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스물한살에 미국으로 밀항하였다. 1864년 당시는,  일본인의 해외 도항은 위법이었기 때문에 체포되기라도 하면 그 꿈의 대가로 목숨이 위태로웠던 시대였다.

  니이지마는 필립스 아카데미와 애머스트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일본인으로  그후 회중교회의 목사가 된다.  일본으로 귀국하였을 무렵에는 서양의 이상과 기독교 윤리성에 입각한 고등교육기관 설립의 필요성을 확신하고 있었고  이리하여 니이지마는 1875년 도시샤라는 영어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 유학을 통해 서구의 발전이 기독교적이 이념과 실천이라고 간파하고 돌아와 사재를 털어서 관립과 공립에 대항하여 학문의 자유와 진리 그리고 기독교의 이념을 기초로 한 대학을 세운 것이다. 그 이름을 도시샤(同志社) 라고 했는 데 “동지" 라는 말에다가 일본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會社“(가이샤) 라는 단어를 조합하여 붙였다.

  도시샤대학은 창립자의 염원이었던 기독교에 입각한 교육기관으로 유치원으로 부터 중고등학교 까지 세웠고 우치시 인근에 교다나베에 이과대학을 설립하여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이 되였다.  니이지마 죠의 이념은 금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변질되지 않고 이어져 도시샤대학의 모든 재학생들에게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그는 천보(天保)14년(1843년)  에도(江戶, 現동경)의 안나카(安中) 번저내(藩邸內)에서 태어나, 격동의 막부 말기를 보낸다. 니이지마는 어려서부터 크리스트교 교의(敎義)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의 일본에 진정 필요한 것은 기술력이 아닌, 바로 도덕적인 개혁이라고 확신한 그는 미국으로 밀항을 시도했던 것이다.

 일본의 개화초기인 명치(明治)5년 (1872년)에 일본의 공무원과 청년 지식인들로 구성된 "이와쿠라 토모미 사절단(岩倉具視使節團)" 이 최초로 유럽과 미국을 시찰할 때에 미국에 있는 일인으로 영어에 능통한 통역관을 찾을 때에 자원하여 합류하고 이를 통해서 견문을 넓혔다.  밀항했던 그는 공로로 말미암아 일본정부 발행의 관립 여권을 갖고 일본으로 다시 들어오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
   
  니이지마 죠의 생가에 있는 이수정이 쓴 한문 족자 성경 

  명치 8년(1875년) 11월 29일, 10년의 세월을 타국에서 보내고 일본으로 귀국한 니이지마는,  조국발전의 토대라고도 말할 수 있는 교육에 공헌하기 위하여 교토의 중심부 천황의 처소인 코쇼(御所) 옆에 상국사라는 절터를 빌려서 영어를 가르치는 동지사영학교(同志社英學校)라는 중등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이후동지사 본교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국사라는 절에 임대료를 주고 운영하고 있다.
   
                                            윤동주의 시비에는 서시가 새겨져 있다. 

  동지사대학이 일본의 민간 최초의 대학 혹은 기독교 대학으로 유명한지만 한국의 윤동주시인과 정지용시인을 배출한 학교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다.  캠퍼스에는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윤동주시인의 조국애의 정신을 기리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시비에는 윤동주의 대표작 "서시(序詩)"가 자필로 새겨져 있으며 일본어로도 번역되어 있다.  윤동주의 시비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만주 용정과 다녔던 연세대(연희전문학교) 교정,  그리고 유학했던 동지사 대학 등 3국에 시비가 세워져 있는 최초의 한국인이다.  더욱이 일본에서는 최초로 세워진 외국인 시비라는 말도 있다.

도시샤대학은 해방을 전후로 상당수의 한국인이 유학했던 학교. 특히 신학부 출신이 많아 해방 이후 한국교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해방 전에는 정대위 윤성범 김태묵 서남동 등이 도시샤대학 신학부에서 수학했으며 해방 후에는 강근환 기원형 김호식 박영배 김영일 김수진 반병섭 노홍섭 김병순 등이 수학했다.  도시샤대학 신학부는 전반적으로 진보적 색채를 띠고 있다고 한다. 이는 도시샤대학이 일본조합교회의 영향 아래 설립된 학교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일본조합교회는 전통적으로 좌파 성향이 강했던 교단.  그러나 1942년 일본 개신교파가 '일본기독교단'으로 통합된 이후로 각 대학의 신학적 차별이 없어졌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일부 교단 환원주의자들은 일본기독교회(장로교), 감리교 등 소수 교단을 만들어 나갔고 교단 신학교도 세웠다. 그러나 현재 일본의 기독교단과 관계가 있는 대학은 도시샤대학 신학부와 동경신학대학 두 곳이다.

도시샤대학은 종합대학이지만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학교인 만큼 지금도 신학부가 중심적인 학부 구실을 하고 있다. 도시샤대학 신학부는 전통적으로 역사신학이 강하며 그런 이유로 조직신학도 역사신학으로 분류되고 있다고 한다. 도시샤대학 신학부가 한국 신학계의 주목을 받는 것은 국내에 민중신학과 토착화 신학의 문을 연 양대 신학자, 서남동과 윤성범이 공부한 곳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죽재 서남동은 193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세 나이에 도시샤대학 문학부 예과를 1년 수료한 후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쌓았다. 도시샤에서의 신학공부는 서남동에게 있어 신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41년 신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한 뒤 서남동은 한국신학대학(한신대학교의 전신), 연세대학교 신학과 교수 등을 지내며 독자적 신학노선을 구축, '민중신학'을 창출하여 한국은 물론 제3세계 신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1941년 도시샤대학 신학부를 졸업한 해천 윤성범 목사는 신학의 토착화와 한국적 신학을 주창한 인물. 바르트의 제자이기도 했던 윤목사는 단군신화 논쟁(1963), 유교의 진리체계와 접목시킨 '성(誠)의 신학' 논쟁(1973)을 불러일으키는 등 기독교와 한국사상과의 만남을 통해 한국적 신학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1977년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에 취임한 그는 국내 유교·불교 학자들과도 폭넓은 교유를 가지며 국제 종교사회학에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국내 신학자 중 도시샤대학 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최초로 받은 사람은 연세대 신학과에서 은퇴하고  서울장신대 총장을 역임한 민경배 박사다.  민 총장은 1984년 '한국에 있어서의 씨족주의 운동과 기독교회의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신학박사를 받았다. 그외에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지낸 고 이국선 목사(인천 산업선교회)도 1969년 도시샤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또한 1974년부터 86년까지 향린교회 당회장, 91년까지 경동교회 당회장, 2000년까지 예닮교회 당회장을 지낸 바 있는 김호식 목사도 1972년 도시샤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한 인물이다. 

도시샤대학 신학부에서 수학한 국내 기독교 역사학자로는 강근환(서울신대 명예총장), 민경배, 서정민 교수(연세대) 외에도 교회사 야사가로 유명한 김호진도 도시샤에서 수학했다. 조직신학 분야에서는 안양대 교수를 거쳐 연세대 교목인 조재국 교수가 1995년 '한국의 민중종교와 기독교'를 주제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신학부는 아니지만 서울여대 총장이었던 고황경 박사와 감리교여선교회전국연합회 회장이었던 김옥라 박사도 도시샤대학 출신이다.   가장 최근에는 이치만 교수(장신대 교회사)가 교회사로 박사학위를 했고 이어  현재 신학부에는 이원중 목사가 박사과정에 있으며 유학생 중심의 유서 깊은 동산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 월북시인 정지용의 시비도 바로 옆에 세워져 있는데 시비에 새겨진 그의 대표작 "향수(鄕愁)"는 그가 당시 이곳에서 바다 건너 조국을 그리며 쓴 작품으로 전해진다.  이 두 시비 바로 옆의 동지사 대학의 채플은 일본의 중요 문화재이며 특히 동지사대학의 신학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한국교회사와 관련되 많은 자료가 있다.   

경도에서의 재일대한 기독교회와 동산교회의  역사 
  경도는 일본의 역사속에서 가장 오래되고 일본다운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일본 제 2의 국립대학인 경도대학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노벨상 수상자도 여럿이 나왔고 사상가도 많다. 그 중에는 일본공산당의 지역의원도 있다. 경도는 로마, 경주와 함께 천년 왕조의 수도였던 도시이다. 고색 찬란한  경도는 도시 전체가 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에도 초기 유학생들과 한인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교회가 세워졌는데 경도 남부교회와 동산교회가 있다. 그외 요한교회와 성복교회등 한인계통의 교회가 있기는 하지만 오순절계통의 교회에 다수의 한인들이 모이고 있지만 교토가 워낙 전통적인 도시라 일본인들의 전도나 개종은 싶지 않다. 일본인 교회로는 황궁인근의 성공회와 기독교 학교 일본기독교단 교회들이 있다.  그래도 동지사대학이 기독교 학교인 관계로 이 학교롤 졸업한 동문들의 교회가 많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던 1934년 6월에 교토시 사쿄쿠(左京区) 다나카(田中) 지역에 고광모 라는 유학생이 가난한 조선인들을 위하여 다나카전도소(田中伝道所)를 설립했다. 다나카전도소는 당시 부모들이 일하러 나가고 나서 방치된 아이들을 돌보며 조선어, 조선역사 등을 가르치는 일도 했었다. 이 일은 당시 그 지역의 고통받는 사람들의 문제에 응답하는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기에 1935년 10월에 당시 조선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던 교토 역의 남쪽 지역으로 옮겨져 이것이 후일 ‘재교토조선중앙보육원’이란 이름의 보육원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 보육 시설은 여러 과정을 거쳐서 재일대한기독교회의 대표적 교회 가운데 하나인 교토교회에 의해 ‘사회복지법인향상사(社会福祉法人向上社)’란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사업이 진행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다나카전도소는 일본의 군국주의화가 급속히 진전되어 감에 따라 1941년 8월 폐쇄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인 맥을 다시 이어간 분은 라증남 목사이다.  그는 해방 전 만주의 은진학교(윤동주 시인의 모교) 출신으로 오사카의 민족학교인 건국학원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칙코(築港)교회에서 은퇴하게 된다. 그리고 나 목사는 쿄토에 와서 다나카전도소의 뜻을 이어 가고자 다나카전도소가 창립되었던 60년만인 1994년 9월 ‘동산전도소(東山伝道所) 로 개척을 하였다. 하지만 예배장소를 구할 수가 없어서 인근의 회관, 유치원, 까페, 일본인교회 등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 나그네 생활이 게속 되었다.

 나증남 목사가 노환으로 교회를 사임한 후 당시 동지사대학 신학연구과를 졸업한 이상경 목사가 2004년 5월에 위임을 받아 2007년 6월까지 동산교회를 섬겼는데 이 때 동문수학한 이치만 목사도 동역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예배처소는 주일마다 다른 곳을 빌려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그럼에도 이상경 목사의 친화력있는 리더십으로 동산교회는 도시샤대학, 교토대학, 리츠메이칸대학 등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위로와 격려의 공동체로 자리잡았다.  그후 이상경 목사는 서부지방 가와니시교회 담임목사를 지냈다. 그후 이 목사의 부인 강부경도 동지사 출신으로 일본기독교교단에서 안수받은 여성목사다. 그가 사카이시 소재의 한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을 하여 사부가 되었다가 그후 쿄토부 福知山(후쿠지야마)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을 하였다.
   
          동산교회 앞 현수막에 "모든 사람의 기도하는 집" 이라고 써여졌다

  그러던 중 2008년 3월 이원중 목사(안미연 전도사) 부부가 동지사에 유학을 오면서 동산교회의 설교 목사로 봉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3년간 일본기독교회(日本キリスト教会)소속의 요시다교회(吉田教会)의 예배당을 주일 오후만 빌려서 예배를 드리며 교회 공동체의 구성에 정성을 기울이던 끝에 교인들의 뜻이 모아져 동산교회만의 예배당을 운영하기로 하고 준비기간을 거쳐 2012년 6월 지금의 예배당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번 방문 과정 중 일행은 동지사 대학교에서 이원중 목사를 만나서 동산교회 예배당으로 갔는데 그 위치가 과거 다나카전도소가 있던 곳과 불과 도보로 2~3분 떨어진 곳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나카전도소가 폐쇄된 지 약 70년 만에, 동산교회라는 이름으로 재 창립된지 약 18년 만에 처음 교회를 시작했던 자리로 돌아 온 것 같다는 것이다. 동산교회의 홈페이지에서 이원중 목사는 “하나님께서 이 자리, 이 지역에서 동산교회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소망합니다” 라고 쓰고 있다.  
     
 

이원중 목사 약력   

- 학력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B.A.)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도시샤대학교(同志社大学) 대학원 신학연구과 (Th.M.)
동대학원 박사과정 재학중 (Th.D. Candidate), 일본개신교 교회사 연구

- 약력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총회파송선교사
동교단 동서울교회, 마포장로교회, 고척교회 등에서 사역
인도 견습선교사, Union Presbyterian Seminary 교환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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