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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12.13  20: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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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 기독교 여성전 

채송이 목사(PCK 총회 기획국 실장) 

<말씀이 육신이 되어>

부서진 번갯불
까맣게 속이 타는 빛의 씨알들처럼
왜 자꾸만 기도가 하늘에서 쏟아질까
이 작은 방에
쓰리고 아픈 눈물에 젖은 기도들이
뼈 마디마디 울리는 기도들이
하늘로 되돌려주는 기도들이
이제 세상으로 흩어질 밖에 없어라
어두워 오는 하늘 아래
파아란 횃불로 타오르려고

이 시는 1975년 문익환 목사가 쓴 <301호실>이라는 시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의 제목인 301호실이 문익환 목사가 감옥생활을 했던 시기의 어느 감방의 방번호이겠거니 생각하지만(실제로도 어느 유명한 목사가 설교에서 그렇게 말해서 오해를 더 굳혔다) 실은 그렇지 않다.

301호는 종로 5가 기독교회관 3층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전국연합회의 사무실이 있던 곳이다. 그 사무실에는 아담하고 말수가 적은 한 중년여성이 있었다. 그는 한때 한신대학교의 교수였고 시가 쓰인 당시 서울여대 교수,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던 이우정(1923-2002) 선생이다.

몇 년 전 어느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강의를 마치고 학생들과 자유롭게 토론을 하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교회와 교단에 갇힌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목사라는 직업 탓에 내가 온종일 상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며 특히 내가 속한 교단의 사람들이다. 나는 학부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했다. 어쩌다보니 영어는 그럭저럭 하는 편이며 중국에서 살았던 시절이 있어서 중국어도 할 줄 안다.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을 살면서 느낄 때가 많다.

그런 내가 이 학생들과 대화를 하면서 언어의 장벽을 느꼈다. 그것도 서로 같은 한국어를 말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날 내가 사용한 언어는 종교의 언어, 기성세대의 언어였고 학생들이 듣고 싶었던 언어는 교단과 교회를 넘어서는 소통과 생명의 언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였다. 이게 나만의 문제일까. 그날 이후 나는 심각하게 ‘선교적 언어, 성육신적 언어’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내 책장에 꽂혀있는 <이우정 평전>을 다시 꺼내 들었다.

301호실로 돌아가 보자. 1970년대 중반 한국교회여성연합회라는 교회여성들의 초교파 연합체의 회장직을 맡고 있던 이우정 선생은 자기가 속한 기독교장로교 여신도회전국연합회 사무실인 기독교회관 301호실에 주로 있으면서 일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곳에 사무실 일과 관련 없는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남산부활절연합예배,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3.1 민주 구국 선언 등 시국에 관련된 굵직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관련자들의 가족들이 이 방에 몰아닥쳐 이우정 선생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눈물을 쏟아내고 도움을 구했다. 이 방에서는 그들의 아픔을 끌어안는 기도가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 방은 자연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심지어 일간지 기자들도 수시로 들락거리며 기사거리를 얻어갔다. 그 시절의 풍경을 문익환 목사가 시로 써냈고 그게 위의 시이다.

이우정 선생은 <자유종>이라는 신소설로 유명한 소설가 이해조의 손녀다. 소녀 시절 친구를 따라 간 교회에서 기독교 신앙을 접하고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의 전신)에 진학한다. 평생의 스승이었던 장공 김재준 선생의 권유로 한국전쟁 동안 캐나다 임마누엘 신학교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1953년부터 1970년까지 17년간 모교인 한신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우정 선생의 삶은 나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교회와 자신이 속한 교단에 갇힌 삶이었다. 학생들을 성실하게 가르치고 여학생 기숙사 사감을 하면서 여학생들을 알뜰살뜰히 살피는 것이 이우정 선생의 삶의 전부였다. 그러나 1970년 학내 분쟁에 휘말리며 한신대학교를 사임하고 마침 그해에 있었던 전태일 분신사건을 접하면서 선생은 편안했던 울타리 밖의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신동아>와의 인텨뷰에서 그는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한국신학대학에 있던 17년은 제가 산 게 아니었어요. 노동자들의 인권이 유린되고 있는 마당에, 저는 그런 일이 있는 줄조차 모르고 제 강의에만 충실해서 단계를 밟아 교수로 올라가면 그만이며 그게 제 보람이었죠. 종교적 입장에서 말은 할지언정 실상은 몰랐습니다.” 그도 한 때는 종교적 언어에 갇힌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울타리를 열고 나와서 세상 한복판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전태일 분신사망 사건에 대한 그의 이야기도 들어보자.

“나는 한신대 교수로서 안일한 삶에 파묻혀 무슨 ‘탈출’이니 하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내게 충격을 준 사건이 있으니 그것은 전태일 씨의 분신사건이었다. 그때 나는 내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 무거움은 노동자들 특히 여성노동자들에게 ‘빚진 자’라는 죄책감으로 돌아갔다. 나는 자신이 누려온 특권적 삶을 죄책감과 함께 돌아보게 되었다.”

이후 이우정 선생은 교단과 교회의 종교적 언어를 뛰어넘어 고통받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구사했다. 이우정 선생에게 있어서 가장 짓밟힌 사람은 노동자들 그중에서도 여성노동자들이었다. 동일방직, 원풍모방, 남영나일론, 성도섬유, YH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했다. 외화벌이의 역군으로 포장되었으나 실상은 대한민국 딸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기생관광을 철폐하는 운동을 조직적으로 벌였다. 청계천, 중량천변의 철거민들, 유신 철폐운동으로 인해 구속, 수감, 사형당한 이들과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에도 몸을 아끼지 않았고 원폭피해자들의 보상과 치료를 위해서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당시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이우정 선생에게 붙여준 별명이 있었다. 재야운동의 ‘스페어 타이어.’ 남자들조차 꺼리던 일을 대신 맡아주었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라고 한다. 그 작은 몸으로 그는 광장으로, 재판장으로, 경찰서로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나는 미혼이잖아. 그리고 가족도 없으니까 집에서 혼자 밥해 먹으나 나라가 주는 밥(교도소에서 주는 밥을 말함) 먹으나 별로 다를 게 없어.”

주변 사람들은 그 작고 온화하고 조용한 여성이 어떻게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의 격랑 한 가운데를 그렇게 흔들림 없이 걸어갈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나는 그것이 이우정 선생의 신앙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말씀이 육신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의 성육신적 삶, 선교적 삶을 담아낸 언어. 종교의 틀에 갇히지 않은, 교회의 담 안에 머무르지 않은 생명의 언어. 그는 자신의 삶으로 그 언어를 말했고 그 언어는 선생의 시대에 짓밟힌 자들에게 이해되는 언어였다. 오늘 나는 어떤 언어를 말하고 있을까. 한국교회는 어떤 언어를 말하고 있을까.

* 이우정 선생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은 이문숙 저, <이우정 평전>을 일독하시기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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