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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소신공양" 인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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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12.08  23: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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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신공양(燒身供養;Burning Service)

송필경(대구, 치과의사 연세대 치대 졸업, 학생운동과 지역운동과 베트남 참전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위하여 직접 월남에 방문, 지금은 "전태일의 친구들" 발의자, 대표로 대구의 전태일 가족이 살던 집터를 시민모금으로 구입하여 보존을 위한 활동중)  

   
 

1. 네거리 한 가운데 스님이 홀로 불길 속에 반듯이 앉아 있다. 불길은 스님 몸을 에워싸고 공중으로 활활 타오른다. 스님 몸에 붓다가 흐른 휘발유로 스님 주변도 불바다를 이루었다. 뒤에는 휘발유를 담았던 빈통이 있다. 스님은 그런 불길 속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스님을 중심으로 한 네거리에는 많은 스님들이 빙 둘러 있다. 불길이 스스로 서서히 꺼지자 스님의 숯덩이 몸이 드러났다. 스님의 가부좌 자세는 그대로였다. 1963년 6월 11일 오전 10시, 사이공 시내 한 네거리에 있은 분신, 뒤에 역사는 스님의 분신을 이렇게 일렀다. 《불의 바다에 핀 연꽃(Lotus in a Sea of Fire)》 뉴욕타임스 베트남 특파원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의 목격담이다. 『나는 그 광경을 다시 볼 수도 있었지만 한 번으로 족했다. 불꽃이 솟구치더니 몸이 서서히 오그라들면서 머리는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사람 살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놀라울 정도로 몸은 빠르게 불탔다. 내 뒤에 모여든 베트남 사람들은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는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극도로 혼란스러워 메모를 작성하거나 질문을 던질 수도 없었다.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 가면서도 ‘틱꽝득’은 미동은커녕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이 울부짖는 주위 사람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었다.』  한 여승(Chan Khong)은 그날, 자신의 오토바이를 타고 그 십자로를 지나던 참에 정말 우연하게 스님의 분신자살을 목격했다. “꽝득 스님은 화염에 휩싸여서도 용감하고 온화한 얼굴로 평화롭게 앉아 계셨습니다. 인도에 엎드려 울부짖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스님은 완전한 부동자세였다.” 베트남 마지막 왕조의 수도였던 중부지방의 도시 훼(Hue)에 ‘티엔 무 사(Thien Mu Pagoda;天母寺)’가 있다. 이 사원 중간에 있는 한 건물에 꽝득 스님이 이 절에서 사이공까지 타고 간 영국제 녹슨 하늘 색 오스틴 승용차와 스님의 여러 사진이 전시해 있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가장 존귀한 꽝득 스님은 1963년 6월 11일, 이 차를 타고 엉 꽝 사에서 판 딘 퐁 거리와 레 반 주엣 거리의 교차로로 갔다. 가장 존귀한 스님은 차에서 내려 곧바로 연화좌로 앉아, 불교도를 차별하고 종교적 자유를 모독하는 응오 딘 지엠 정권의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자신을 불살랐다.』 여기에 전시한 사진을 찍은 ‘말콤 브라운(Malcom Browne)’은 AP통신 사진기자였다. 격렬한 불꽃 속에서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가부좌 자세를 취한 스님의 모습을 촬영하여 1963년 퓰리처상(세계보도사진상)을 받았다.
 
2. 푸른 벼가 바다처럼 펼쳐 있는, 풍요롭고 비옥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인구 8할 이상이 오랜 대승불교를 믿는 나라, 외세에 저항할 땐 치열하지만, 평소는 유순하기 그지없는 민족. 예술에 재능 있고 예술을 사랑하며 특히, 누구나 시를 짓는 정감이 넘치는 민족. 그 땅, 그 민족의 몸에서 화염을 내뿜는 과격한 사상이 어떻게 나왔을까? 1954년 베트남은 자신들을 1백년간 식민 지배한 프랑스를 물리쳤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유럽 식민 본국을 무력으로 무찌른 것은 역사에서 처음이었다.  승리한 베트남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열린 제네바 협상에서 인민의 투표를 통해 스스로 정부를 택할 당연한 권리를 찾았다. 호찌민 정부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을 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미국은 사회주의 정권의 탄생을 용납할 수 없어, 제네바 협정을 어기고 1955년 베트남을 강제로 남북으로 갈랐다. 베트남은 얼토당토않았지만, 힘이 없었기에 오만하고 편협한 미국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그 뒤 무력으로 침략한 미국을 수렁에 빠뜨려, 1975년에 민족통일을 이루면서 미국 힘의 논리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 1955년, 미국은 베트남을 분단한 후 북쪽 호찌민 정권에 대항할 남쪽 괴뢰 정권을 급조했다. 미국이 선택한 인물은 칭찬할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응오 딘 지엠(Ngo Dinh Diem)이었다. 한반도에 골수 친미 반공주의자 이승만을 세워 재미 본 것처럼, 1955에 미국은 남베트남에 이승만과 여러모로 닮은 지엠을 대통령으로 앉혔다. 민족주의자로 자처한 지엠 또한 철저한 친미 반공주의자이며 반프랑스 탈을 썼지만 프랑스 식민에 협력했던 인사들로 정부를 꾸렸다. 지엠의 통치는 이승만,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 이 셋의 악행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잔혹하였고 또한 그 부패는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지엠의 동생 응오 딘 뉴는 직함이 단지 대통령 고문이었지만 실제로는 배후권력을 장악했다. 당시 CIA 자금으로 편성된 특수부대가 남베트남에 파견되어 있었다. 뉴는 그 특수부대를 자신의 사병으로 부렸다. 뉴의 아내 ‘마담 뉴’는 사실상 퍼스트레이드 노릇을 했다. 시아주버니인 지엠이 독신이었기에 마담 뉴가 베트남의 여왕으로 군림했다. 정부 요직은 지엠 친척 차지였다. 지엠 일족은 가톨릭 신자였다. 형은 가톨릭 대주교 응오 딘 툭이었다. 베트남은 인민 8할 이상이 불교 신자다. 지엠과 정부 고위층들은 식민지 시절 프랑스 교육을 받은 탓에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다. 권력과 부를 극소수 가톨릭이 독점했다.

3. 지난 2천 년 동안 외세에 저항한 베트남 역사에는 거대한 강이 있으니, 수많은 항쟁의 격언과 믿음이 흘러들어 왔다. 선조들의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강에는 언제나 신선한 피로 붉게 물들었다. 베트남은 1백 년 동안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이 점령했다. 베트남은 일본이 항복하기 전부터 군사 공격하여 연합군이 베트남에 들어오기 전에 일본군 무장을 해제하고 독립은 선언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나자 미국의 도움으로 다시 침략한 프랑스와 약 10년 동안 처절하게 싸웠다. 프랑스가 물러난 자리에 미국이 들어오자 소중한 ‘민족의 독립과 자유’가 짓밟히고 땅은 두 갈래 났다.  20세기 후손들은 선조의 숭고한 저항 역사를 결코 잊지 않았다. 미국의 지배를 받는 남베트남 민중의 저항은 거셌다. 때문에 남베트남의 수많은 감옥에는 정치범이 10만 명에서 15만 명을 헤아렸다. 한 감옥에서는 정치범 약 5천명에게 독약을 탄 음식을 먹였고, 그래도 살아남은 자들에게 총탄 세례를 퍼부었다. 남베트남 민중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르자 무장 게릴라를 조직했다. 1960년 12월 20일, 북베트남과 아무 관계없는 자발적인 전사들이 모여 <민족해방전선>을 만들었다. 미국이 ‘베트콩’이라고 비하한 이 무장 단체가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괴뢰정권을 곧 무너뜨릴 듯 위협했다. 갓 취임한 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어떻게 해서든 남베트남을 사수했어야 했다. 혹시 베트남이 공산화 되면 젊은 케네디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케네디는 남베트남에 무력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괴뢰정권에 무기 공급을 확대했다. 미국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침략하자 남베트남 민중의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세계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흘려보내는 정보의 장막에 가려져 베트남 민중 고통의 실상을 전혀 알 수 없었다.

4. 몸을 불사른 스님은 틱꽝득(釋廣德 Thich Quang Duc). 틱(釋)은 스님이라는 뜻이고 꽝득(廣德)은 법명이다. 우리말로 하면 광덕 스님이다. 원 이름(俗名)은 람 반 팟(林文發; Lâm Văn Phát)이다. 1897년 베트남 중부 아름다운 해변마을 나짱에서 농민의 아들로 출생했다. 일곱 살에 출가해서 남베트남 각 지방에 포교하며 평생 30여개의 절을 건립한 인물이었다. 부와 권력을 손아귀에 쥔 베트남 가톨릭 세력은 불교를 탄압했다. 많은 사찰을 닫게 하고 승려를 해산했다. 이는 정권 부패를 비판하던 불교계에 대한 보복이었다. 지엠 일족은 베트남을 가톨릭 나라로 만드는 것을 사명이라 믿고, 저항하는 불교도를 모조리 체포해서는 갖은 고문을 했다. 절을 봉쇄하고 수돗물과 전기 공급 심지어 음식까지 차단했다. 남베트남 각지에서는 불교도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부 젊은 승려들은 게릴라전을 펼치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과 물밑에서 조용히 연대하고 있었다. 아, 불교도들의 무장 투쟁에 찌푸린 눈길을 보낼 필요는 없다. 임진왜란 때 우리 땅의 불교 승려들이 조직한 승군(僧軍)을 기억해 보라! 1963년 5월 1일부터 9일까지 부처님 오신 날 기념행사가 열렸다. 베트남에서는 가장 신성한 날이다. 그런데 성모 라벤 교회의 낙성식과 시기가 겹쳤다. 그 행사에는 응오 딘 지엠 대통령과 동생 뉴 고문 부부, 형인 툭 대주교가 참석키로 했다. 그 교회에 가려면 베트남 중부 도시 훼를 통과해야 했다. 훼는 마지막 왕조의 수도였으며 베트남 불교 중심지다. 훼 거리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저게 뭔가?" 하고 대통령이 물었다. "불교의 상징입니다."고 수행원이 대답하자, 곧바로 전국의 불교 깃발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깃발을 내릴 수 없었다. 항의 데모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훼 시민들의 불만과 저항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훼 시장은 깃발을 올려도 된다고 라디오 방송에서 약속했지만, 결국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을 바꾸었다. 5월 8일 불교 깃발을 걸고 가는 긴 행렬을 향해 군의 장갑차가 돌진하며 발포했다. 우리 5.18과 비슷했다. 14명이 중상을 입고 8명이 죽었다. 아이들도 장갑차에 깔려 죽었다. 여덟 명의 영정은 사이공으로 옮겨져 싸러이사에 공양되었다. 사이공 거리는 마치 들끓는 기름 가마 같았다. 불교 데모는 점점 격렬했다. 군은 물대포를 쏘고 최루탄을 던졌지만 진압하지 못했다. 데모에 선두에 선 것은 젊은 승려들이었다. 그들은 비폭력으로 일관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그런 상황에서 꽝득 스님은 자신의 몸을 스스로 불태우는 소신공양를 결심했다. 아침 10시 꽝득 스님은 십자로에 앉아 불길에 휩싸이면서 15분 동안 미동도 없었다. 그리고 천천히 하늘을 향해 쓰려졌다. 양 손 손가락으로 감로인(甘露印) 표시를 한 채였다. 스님의 유해를 불교 깃발에 싸서 ‘싸러이’사(寺)로 옮겼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군대가 출동하여 싸러이사를 가시철이 박힌 철조망으로 봉쇄했다. 비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쳤다. 사람들은 흠뻑 젖은 채 언제까지고 돌아가지 않았다. 싸러이사 본당엔 관을 준비했고, 검게 탄 유해를 천에 싸고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찻잎을 넣어 두었다.  다음날 싸러이사에는 10만 명의 군중이 모였다. 일터며 가게며, 학교를 일제히 쉬고 물처럼 몰려들었다. 6월 20일 이른 아침, 광득 스님의 유해를 화장터로 옮겼다. 부패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은 들끓었다. 관에 다이너마이트가 장치되어 있다는 소문까지 퍼졌지만, 화장터까지 이어지는 7km의 길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화장터에 도착했을 때 오전 9시였다. 아침이 이른 베트남에서는 이미 점심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꽝득 스님의 유해를 소각로에 옮겨 디젤 연료를 사용한 4,000도의 불로 6시간 태웠다. 그런데 심장만은 타지 않았다. 다시 연료를 보충하여 오후 3시에서 오후 5시까지 태웠으나 심장은 타지 않았다. BBC나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는 '영원의 심장(Eternal Heart)'라고 보도했다. 스님의 심장을 싸러이사에 안치하기로 했다. 또 사람들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모두가 울면서 '영원의 심장'을 우러렀다. 아, 이게 현대 신화인가?

5. 지엠 정권 각료들은 대책 마련을 서둘렀다. 타오르는 스님의 모습은 전 세계 신문지면에 머리기사로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충격을 받고 전율했다. 그리고 베트남 국내에서는 '영원의 심장'에 대한 열기가 번져갔다. 지엠은 매우 당황했다. 이대로는 미국 정부의 지원을 못 받게 될지도 몰랐다. 우선 '영원의 심장'을 어떻게든 없애야 했다. 그래서 비밀경찰 두목을 싸러이사로 파견했다. 두목은 '영원의 심장'에 황산을 뿌렸다. 하지만 심장은 녹지 않았다. 비취처럼 단단해졌고, 비밀경찰이 그 심장을 가져가려고 했다. 승려들은 '영원의 심장'을 지키기 위해 금속 용기에 담아 구리줄로 단단히 봉인하고 나서 사이공 시내의 스웨덴 은행에 맡겼다. 거기라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다. 베트남전쟁이 끝나자 하노이 국립은행으로 옮겼다. 지금은 사이공(호찌민시)에 돌아와 카이 호이 다라 근처에 있는 국립은행에 보관하고 있다. 꽝득 스님 소신공양 이후 정부의 탄압은 더 심해졌다. 8월 21일 계엄령이 내려진 한밤중, 특수부대가 베트남 각지의 절을 습격하여 1,400명에 달하는 승려들을 일제히 체포했다. 훼에서는 백 명에 가까운 승려와 불교도들이 죽었다.

6. 꽝득 스님! 농민의 아들이 일곱 살에 출가해서는 올곧고 정직하고 진지한 승려가 되었다. 1963년, 스님은 예순여섯의 노령임에도 불교도들의 데모나 단식에 참여했다. 5월초 탄압은 더욱 과격해지고 훼에서는 잔인한 학살이 일어났다. 스님은 훼에서 있은 학살을 두고 말씀을 남겼다. "이 가슴 아픈 사건을 앞에 두고, 베트남공화국 헌법과 응오 딘 지엠 대통령이 주장하는 민주법치, 공동공진사회의 노선에도 명기되어 있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그 이상을 위한 투쟁에 베트남 불교도는 일어서야 한다. 정리(情理)에 맞는 투쟁을 위해, 규율을 지키고 비폭력적인 온건하게, 베트남 불교 승려들은 이 베트남 불교에서 일찍이 없었던 국면을 맞이하여, 투철한 의지를 가지고 진정한 의사 표현을 해야 한다." 5월 27일 스님은 베트남 통일불교회에 스스로 몸을 불사르겠다는 '소신공양 청원서'를 제출했다. 통일불교회는 지도자 열다섯 명의 지도자가 있다. 이들이 최종 결정을 한다. 분신 허가를 신청한 청원서는 이 지도자들에게 제출했다. 스님은 지엠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나, 비구 꽝득은 관태음사 주지입니다. 우리나라 불교가 고난의 때임을 보고, 수행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불교가 멸망해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 이 한 몸 불살라 불교를 지키는 공덕을 행할 수 있기를 기꺼이 청합니다. 나라가 태평하고 국민이 안락하기를 기도합니다. 눈을 감고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감히 응오 딘 지엠 대통령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박애와 자비의 마음으로 국민을 위해 종교 평등의 정책을 실행하고, 그리하여 영구적으로 나라를 지키도록 말입니다. 나는 승려와 불교도들에게 진심으로 청합니다. 불법을 지키기 위해 일치단결해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사이공, 1963년 6월 4일 비구 꽝득 올림" 스님은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내가 불타서 만약 뒤로 쓰러져 하늘을 보면 우리들의 투쟁은 성공하고 평화가 올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엎드려 쓰러지면 불길한 징조이니, 그때는 해외로 도망하라" 제자들은 다짐했다. “스님의 희생을 개죽음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아시아인 단 한 사람의 정신력으로 전 세계를 떨게 만드는 것이 우리 역할이다." 스님은 분신의 목적을 단 한 줄로 적었다. "우리들의 입장을 분명하게하기 위해 스스로 이 몸을 불사른다." 남베트남 정부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유린해 오는 미국에 항의하기 위해 가솔린을 뒤집어쓰고 제 몸을 불사르기로 결심했다.

7. 서구 언론은 물론 전 세계가 경악했다. 서양인들은 분신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폭력적 행위로 볼 수밖에 없었다. 분신이 의미하는 커다란 사랑과 희생적인 정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신공양은 대승불교 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성스러운 ‘법화경(Lotus Sutra)’의 극적인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23장에서 보살, 즉 깨달은 존재는 붓다에 대한 열렬한 희생으로 자신의 손가락과 발가락, 팔을 태우고 그리고 끝내는 자산의 신체 전부를 태운다. '이것은 참다운 법으로써 여래를 공양하는 길이다. 나라를 다 바치고 처자로 보시하여도 이것이 제일의 보시다.'라고 했다. 따라서 소신공양은 모든 종교 행위 가운데 가장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틱 꽝 득 스님과 다른 사람들의 희생은 대승불교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만이 온전히 헤아릴 수 있는 의미를 갖는다. 개인적인 좌절이나 절망을 이기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자살하고도 다르다. 프랑스에서 국제 참여불교 운동의 지도자로 주목받는 활동을 펼친 낫 한 스님(Thich Nhat Hanh; 1926〜)은 당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에게 편지를 썼다. “1963년 베트남 스님들의 소신공양은 서구 기독교적 도덕관념이 이해하는 것과는 아무래도 좀 다릅니다. 언론들은 그때 자살이라고 했지만, 그 본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저항 행위도 아닙니다. 분신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 스님들이 말하는 것은 오로지 ‘압제자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그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 목적이며, 베트남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세계 이목을 집중하게 하는 목적입니다.”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은 힘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려는 데 가장 큰 목적이 있었다. 꽝 득 스님의 분신은 현대 불교의 사회적 정치적 특징을 강력하게 드러냈다. 화염 속에서 죽어가며 좌선하고 있는 승려 모습을 통신사와 텔레비전이 보도했고, 이어 36명의 다른 스님들과 1명의 재가 여성 신도가 분신함으로써, 지엠 정권을 향한 불교도들의 고통과 저항의 메시지를 전 세계 사람들 마음에 깊이 새겼다. 그러나 이들 죽음의 불교적 의미를 대부분의 서구 시청자와 논평가들은 놓쳤다. 승려가 정치적인 저항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었을까? 이 스님들은 대중들의 감정을 대변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극단적인 행동가들인가? 자기 몸을 바치는 것이 전통적인 수행의 하나였는가 아니면 정도를 크게 벗어난 것인가? 베트남의 대승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비구계를 받으려는 사람은 승가의 250계를 준수하겠다고 맹세하면서 작은 점 크기로 자신의 신체를 태운다. 이는 격렬한 고통을 경험하면서 말한 맹세는 '마음의 모든 진지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더 큰 무게를 가질 것이다'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의 자유와 평화를 되찾으려는 불교인들의 행동 동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은 불교인들이 정치적 목표와 종교적 목적을 하나로 봤기 때문에 이들이 언제든 공산주의자와 연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불교계는 남이나 북, 또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았다. 불교계가 가장 큰 목적은 힘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주자는 데 있었다.

8. 지엠 대통령의 친동생이자 비밀경찰 총수인 응오 딘 누의 부인 '마담 누'는 온갖 사치를 누리면서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까지 휘둘러 국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그런 '마담 누'가 승려들의 분신을 보고, "중의 바베큐라니, 재미있네. 하지만 그 중은 모순이야, 반미라면서 미제 가솔린을 사용했잖아.", "그래봐야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바비큐들"이라는 독설을 외신기자들에게 퍼부었다. 결정적인 악수였다. 이 망발에 전 세계 언론을 탔고, 이를 듣고 분노한 시민과 학생 데모대가 날마다 사이공을 휩쓸었다. 베트남의 혼란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미국이 감춘 베트남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이 그토록 꺼려했지만, 이 사건으로 베트남 문제를 비로소 유엔에 상정했다. 케네디 정권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일어난 지 1년도 채 안되었고, 앨리버마주에서는 흑인데모가 막 일어났다. 그런 시기에 분신을 계기로 남베트남이 펄펄 끓는 기름 솥이 되었다. 미국은 지엠 정권을 밀어주는 게 헛일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미국은 결국 지엠 정권을 단념하고 베트남에 직접 개입하기로 했다. 1963년 11월 1일 CIA가 면밀하게 배후 조종한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지엠은 대통령 궁에서 도망쳐 중국인 거주 지구에 숨어 있다가 들켜 자신의 경호원에게 살해당했다. 다음날 지엠은 피투성이 사체로 승용차 트렁크에 처박혀 있었다. 동생 누도 살해당했다. 20일 뒤인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도 댈러스에서 총격을 당해 죽었다. 베트남전쟁 개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케네디도 11월 22일 겨우 1000일의 임기만 채운 채 암살당했다. 그러나 ‘마담 누’는 금은보화를 이고지고 사이공을 탈출하여, 파리에서 은밀하게 살다 수를 다하고 죽었다.

9. 베트남 불교도들의 자기희생 메시지는 양심적인 서구인에게 자신들의 교회사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얀 후스(Jan Huss; 1370∼1415)는 체코의 신학자이자 종교 개혁가였다. 성서만을 유일한 권위로 인정했다. 왕족들의 사치를 혐오하고 고위 성직자들의 세속화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성직을 사고파는 로마 교황청에도 반기를 들었다. 이 순수한 민중의 전도사는 ‘약자를 사랑한 이유로, 강자에게 죽음을 선물로 받았다.’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에 불려가서 이단적인 발언을 취소할 것을 요구받았으나 거절하자 화형을 당하였다. 얀 후스는 사자후를 외치듯 유언을 남겼다. “오늘 당신들은 볼품없는 거위를 태우지만, 100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당신들이 영원히 태워 없앨 수 없는 백조의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오!” 이 유언은 곧 예언이 되었다. 100년이 흐른 뒤 마틴 루터(1483∼1546)가 나타나 1517년 로마 교황청이 면죄부를 마구 파는데 격분하여 이에 대한 항의서 95개조를 발표했다. 이 사건은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개혁의 불을 댕겼다.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는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수도사였다. 수도원에서 정통 신앙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수도원에서 나와 유럽 여러 나라 대학에서 다양한 학식을 쌓았다. 브루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했다. 이 때문에 이단으로 몰리자 칼뱅주의가 지배하던 스위스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만난 칼뱅주의 역시 가톨릭에 못지않은 교조주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다. 자신만이 옳고 결코 자신의 편견을 고치지 않는 자들을 브루노는 참지 못했다. 신앙에 따라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칼뱅주의에 반대하여 인간의 모든 활동은 존엄하다고 주장했다. 브루노는 신교 구교 모두에게 이단으로 몰려가는 곳마다 추방당했다. 브루노는 결국 로마 종교 재판소에 끌려가 로마 교황청 소속 감옥에서 7년간 보냈다. 신념을 포기하라는 강압에 몹시 시달렸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자신의 신념이 그르지 않음을 이해시키려 했다. 같은 지동설을 믿었지만 과학자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에서 신념을 철회했고, 신학자 브루노는 신념을 꺾지 않았다. 교황은 회개할 줄 모르는 고집 센 이단자에게 화형을 명령했다. 브루노는 죽음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았다. “선고를 받은 나보다 선고를 내리는 당신들이 더 두려울 것이오.”는 말을 남기고 입에 재갈을 물린 채 불에 타 죽었다. 세월이 흘러 1899년에 작가 빅토르 위고, 입센 무정부주의자 바쿠닌 등이 사상의 자유를 위해 순교한 브루노 동상을 건립했다. 브루노가 화형당한 로마의 캄포 데 피오리 광장에 세웠다. 브루노 동상에는 다음의 글귀를 새겼다. “브루노에게 그대가 불탐으로써 그 시대가 성스러웠다.” 서구인들이 꽝득 스님에게 감동한 것은 서구 역사에서 얀 후스나 브루노 같은 양심의 신학자를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통닭구이를 만든 경험은 있어도, 자신들의 역사에서 신념으로 스스로 몸을 불태우는 인물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0. 우리에게 분신의 가장 강렬한 기억은 1970년 11월 13일 무지렁이 노동자 전태일 분신이다. 열사의 마지막 유언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마라!”였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외침은 자본주의 노동 착취에서 벗어나려는 각성이었다. 인간을 생산도구인 기계로 취급하는 근로기준법의 무시는 치명적인 사회질서라고 전태일은 확신했다. 이로써 한국 노동운동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참혹한 현실을 예리한 관찰력과 심오한 통찰력으로 남한 자본주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밝혔기 때문이다. 전태일은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고통스런 현실을 단순히 동정하는 시선으로 바라본 게 아니었다. 사회적 약자들이 한갓 기계 취급당하며 빼앗긴 인간의 존엄을 되찾을 수 있게 우리 사회가 법을 지키라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전태일의 진정한 위엄은 노동해방을 넘어 인간해방을 간절히 바란 점이다. 이는 모든 인간을 향한 숭고한 연민이었다. 우리가 전태일을 "투쟁과 단결"이란 틀에만 가두면 전태일의 정신을 협소하게 하거나 그 정신에 내재하는 풍부한 자산들마저 도외시하게 된다. 전태일 분신의 큰 뜻은 7년 전 베트남 꽝 득 스님의 분신과 아주 비슷했다. 비슷한 시기에 한 사람은 제국주의 침략에 신음하는 민중, 다른 사람은 자본주의 착취에 신음하는 민중, 이런 민중의 처지를 바라보면서 두 사람은 같은 고민을 했다. 압제자와 착취자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말이다. 전태일은 어떻게 베트남 스님과 사유의 과정이 비슷했을까? 왜 이 두 사람은 죽음의 방법에 대해 같은 결론에 이르렀을까? 이는 동시대 이웃의 아픔을 따뜻하게 보듬으면서 고통 받는 민중과 더불어 구원을 얻는 삶을 원했기 때문이었을까?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몸을 던져 후세에 큰 뜻을 길이 남긴 살신성인, 그 원조는 썽자오(僧肇:384∼414)라는 중국 진(晉)나라의 승려다. 썽자오는 공사상(空思想)을 크게 떨쳐 중국 선종(禪宗)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중국 불교계의 최대 천재라고 불린다. 썽자오는 자신의 총명을 탐낸 왕이 환속하여 재상을 맡아 달라 간곡히 요청했음에도 끝까지 거절했다. 영민한 썽자오가 혹시 다른 나라로 갈까봐 두려워한 왕의 노여움으로 참수형을 당하는 데, 멋진 시 한 수를 남기고 31세의 나이로 홀연히 사라졌다. 


사대원무주(四大元無主) 오음본래공(五陰本來空) 장두임백인(將頭臨白刃) 유사참춘풍(猶似斬春風) (사대=地․水․火․風: 모든 물질을 조성하는 사대원소) (오음=色;육체, 受;느낌, 想;생각,行;의지,識;의식, 즉 우리 몸) 세상은 원래 주인이 없고 몸은 본래 빈 것이다. 머리를 흰 칼날에 갖다 대어도 이는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을 뿐이다. 몸은 본래 빈(空) 것이므로 칼날이 내 목을 스쳐도 그것은 바람이 스치는 것과 같다, 생사를 달관한 이 멋진 시구의 의미를 교토대학(京都大學) 카지야마 유이찌(梶山雄一) 교수는 이렇게 평했다.
"중관(中觀)사상가들의 생애는 그들의 철학과 명상이 보여주고 있는 절대 정숙과는 매우 다른 광란에 넘친 생애였다. 중관사상의 변증은 그것이 전해주고 있는 공의 세계가 청명한데도 불구하고 논리는 불꽃과 같이 치열했다. 이 세계를 꿈과 환상으로 본 중관 사상가들이 현실에서 본 것은 산림 속의 한적한 생활이 아니었으며, 추악한 인간세의 악몽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결코 중관사상의 본질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악몽의 아픔을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이 세계를 꿈과 환영으로 보는 것이 가능한가?" 민중의 추악한 악몽을 온 몸으로 불사른, 베트남 꽝득 스님! “스님이 불탐으로써 그 시대가 성스러웠다.” 고통에 시달리는 어린 여성 노동자를 위해 살신성인 정신을 계승한 우리 노동자 청년 전태일! “열사가 불탐으로써 우리 시대가 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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