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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장로교(PCUSA)헌법에서 배울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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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1.11  09: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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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장로교(PCUSA) 헌법에서 배울 점  

미국장로교 헌법은 신앙고백서(Book of Confessions)와 규례서(Book of Order)로 나눠진다. 신앙고백서는 니케아 신조(381), 사도신경,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스위스 신앙고백,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 소요리문답, 대요리문답, 바르멘 신학선언, 1967년 신앙고백, 간추린 신앙고백서 등 11개의 신앙고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앙고백서가 교회의 믿음을 보여준다면, 규례서는 교회정치의 원리와 실제적인 내용을 제시하는데, 현재 규례서는 장로교 정치제도의 기초, 정치형태, 예배모범, 권징조례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이는 장로교회는 헌법에 따라 다스려진다는 입헌주의의 원리를 잘 표현한다. 중요한 것은 미국장로교는 이러한 교회 헌법을 교인과 직원이 공유하는 기본 문서로 삼아, 모든 차원의 교육, 특히 임직교육과 목사고시에서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이에 입각하여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2011년 7월 미국장로교는 규례서의 정치 형태를 대폭 개편하였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장로교 정치제도의 기초'와 '정치 형태'를 구분하여, 먼저 교회의 선교와 사명, 신앙고백적 교회, 장로회 정치 원리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그 다음에 이 원리를 기초로 교회 운영의 세세한 내용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는 대의주의, 입헌주의, 관계주의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러한 원리에 따라 일관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며 교회의 사명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이 미국장로교의 확신이다. 이렇게 교회헌법에서 교회의 비전과 원리를 제시하고 그 원리를 구체적으로 담아내고자 노력하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둘째, 규례서 첫 부분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에의 개방성'이라는 항목이 있다. 여기에는 장로교 정치형태가 성경에 근거하며 참된 교회의 표지를 중심으로 세워져 있지만, 모든 면에서 교회의 주님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선언하고(연속성과 변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개혁과 새로운 방향을 찾도록 권한다. 그리하여 장로정치는 성경에 비추어 세워졌지만, 교회에 본질적이거나 모든 기독교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니며(에큐메시티), 장로교인이 된 어느 사람이나 집단에게도 예배, 정치, 생활에의 완전한 참여와 대표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다양성 속의 일치).

그리고 다음 네 가지 영역에서의 개방성을 지니도록 권고한다: 1) 교회와 사회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에 대해 보다 철저하게 순종, 보다 기쁨에 넘치는 예배를 드리도록, 2) 모든 나이, 인종, 민족, 계층의 남자와 여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되고 새로운 인류의 가시적인 표지가 되도록; 3) 세상 안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에 신실하고 유용하도록 장로교의 제도적 형태의 가능성과 위험성을 끊임없이 점검하도록; 4) 세계 교회(the Church ecumenical)를 선교에 보다 효과적이 되도록 지속적으로 개혁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도록 권고한다. 이는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구호를 이어받아 개혁의 방향과 비전을 제시한 조항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 미국장로교는 철저하게 목사와 장로의 동등성을 강조한다. 한국교회도 처음부터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3중직이 아니라 장로(목사와 치리장로)와 집사라는 2중직을 장로정치의 원리로 삼았다. 이는 교회 안의 직제는 직무와 기능의 차이일 뿐이라는 종교개혁적 원리를 더욱 강화시켜, 말씀과 성례의 사역자인 목사와 치리와 돌봄을 담당하는 장로가 '프레스비테로스(장로)'란 명칭으로 동등하게 치리회를 구성한다는 장로정치의 원리를 뚜렷이 보여준다.

2011년에 개정된 규례서는 '사역장로'(Ruling Elder)와 '교역장로'(Teaching Elder)라는 말을 사용하고, 사역장로는 "교역장로(목사)들과 더불어 지도력을 발휘하고, 다스림과 영적 분별을 하며, 규율을 실행하며, 그들은 에큐메니칼 관계를 포함하여 전체 교회와 더불어 개체교회의 삶을 책임진다"고 규정하여 사역장로의 역할을 강조한다. 장로들이 치리회에 모일 때에는 교인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도 아니고 집단이기주의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의 뜻을 구하고 대표해야 한다. 미국장로교에선 사역장로(장로)와 교역장로(목사)의 직무와 권한이 뚜렷하게 헌법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다른 모든 면에서는 목사와 장로가 완전히 동등하게 치리회를 구성하여 교회를 운영하는 집단지도체제를 따르고 있다.

넷째, 미국장로교는 대의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당회와 교회 직원이 가능하면 성, 나이, 지역, 신념에서 교인 전체의 구성과 일치되도록 하는 것이 미국장로교의 정치 이념이다. 또한 교인뿐만 아니라 교회 직원과 모든 의사결정기구에 여성, 장애자, 출신 지역, 신념, 나이 등 다양한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이를 위해 미국장로교는 사역장로와 집사에 시무연한 임기제를 두어 3년을 임기로 하고 6년 이상을 연속으로 시무하지 못하도록 규정한다. 동시에 시무를 중지하더라도 안수 사역의 책임은 지속된다고 밝힌다. 또한 대표위원회를 두어 치리회가 다양하고 포괄적인 교인들의 참여를 보장하도록 하고, 공천위원회는 대표위원회의 조언을 받아 다양한 집단에서 후보자를 공천할 수 있도록 한다.

다섯째, 미국장로교는 개체교회 차원에서는 제직회가 없고 공동의회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대의정치가 원활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공동의회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공동의회는 유명무실하고 제직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리집사까지도 포함하는 제직회는 한국 교회의 독특한 제도인데, 장로회 정치 이념과 한국 교회의 현실 사이에 고민이 필요한 듯하다.

미국장로교에서 공동의회는 1) 장로, 집사, 재단이사를 선출하는 일, 2) 목사(담임목사, 동사목사, 부목사)를 청빙하는 일, 3) 기존의 목회관계를 변경하는 일(청빙조건 검토, 목회관계 해소 요청, 해소에 동의 혹은 거절), 4) 부동산의 구매, 저당, 매각, 5) 임기제한의 면제 허용 요청 등 다섯 가지 안건을 다루도록 규정되어 있다. 공동의회가 장로, 집사를 선출하고 목사를 청빙하는 권한을 가진다는 것은 장로회 정치의 핵심 원리이다. 어느 특정 조직의 권한을 수행할 제직을 선출하는 권리는 그 단체에 속하기 때문이다. 다만 미국장로교에서는 동사목사와 부목사도 우리나라의 위임목사에 준하는 청빙절차(노회 지도, 청빙위원회, 공동의회 선거, 청빙 조건, 위임예식)를 밟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부목사도 위임 목회관계로(무기한과 기한 제한 두 종류) 규정하고 목회관계 해소(해임이나 이임)도 공동의회 안건으로 두는 것이 다르다. 목회관계는 전교인과 목사(노회 주관)와 맺어지는 것이므로,목회관계 해소에 대한 의결도 전 교인들이 참여하는 공동의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미국장로교처럼 교회 헌법과 규례서가 단지 형식적인 요건이 아니라 신학적인 내용을 지니고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이자 사회적으로 성숙한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교육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교회 교육에서 성경 지식암기와 교리만이 아니라 다면적인 사회속에서의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양육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할 것이다.  

미국장로교 약사 

최초 노회 탄생 

1776년 독립 전 미국은 행정상 영국 식민지였으나 그 주민은 영국민 뿐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에서 건너온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돼 있었다. 신대륙에서 형성된 최초 장로교도 다양한 국가 배경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됐다. 장로교 신앙을 가진 영국 청교도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장로교도들, 프랑스 위그노, 화란과 독일과 스위스에서 이민 온 개혁교도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초기에는 어떤 조직도 형성하지 않고 지냈다. 그런데 1706년에 주로 선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Francis Makemie 주도 아래 식민지 노회(Intercolonial General Presbyterian)를 구성했다. 그리고 10 년 뒤에는 최초 대회(General Synod)를 조직했다. 

상이한 두 전통 

이 최초 식민지 장로교회 일부 회원들은 그들이 유럽에서 받았던 박해 때문에 국가권력 간섭을 받지 않는 신앙의 자유를 열렬히 희구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디서나 “정교분리”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런데 그들 이런 정신은 단순한 정교분리를 넘어서 자신들 신앙에 대해 구속력을 갖는 모든 교권을 부인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모든 종교적 결정의 궁극 주체는 각 개인이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한 대표자가 Jonathan Dickinson이었으며, 이것은 영국 청교도들 전형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영국 청교도들보다 더 정통 장로교 전통을 가진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은 영국 청교도들과는 다른 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당시에 교회의 교리 순수성을 보호할 수 있는 아무 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야기될 수 있는 위협, 교회에 대한 교리 위협을 심각하게 느꼈다. 이런 생각의 대표자인 John Thompson은 1727년 대회에서 “교회 순결성을 위해 교회가 공적 신앙고백서를 택해야 한다.” 점을 역설했다. 

이 일을 계기로 미국 장로교에는 목사들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모든 내용을 철저하게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배경을 가진 그룹과 ‘그런 교리적 승인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는 생각을 갖은 영국 청교도 배경을 가진 그룹으로 나뉘게 된다. 그런데 이 최초 의견 대립은 18세기 합리주의 대두에 위협을 느낀 양 진영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공적 신앙 고백서로 채택하기로 합의함으로써 해결됐다. 바로 이 합의가 ‘1729년 채택 조례(Adopting Act)’다. 그런데 신앙고백서와 대회가 개개 신자에 대해 갖는 구속력을 놓고는 양 진영이 여전히 상이한 태도를 취했으며 이러한 상이성은 그 후 두 차례 분열 요인으로 작용한다. 

최초 분열: Old Side / New Side 

1730년대와 1740년대에 미국을 휩쓴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 영향으로 미국 장로교는 최초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미국 장로교가 이 부흥운동을 찬성하는 진영과 반대하는 진영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부흥운동을 찬성하는 진영을 “신파(New Side)”로 불렀고, 반대하는 진영을 “구파(Old Side)”로 불렀다. 

구파는 ‘성경의 권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교회를 중시하는 엄격한 장로교 교회 정치’를 강조한 반면, 신파는 ‘주관적인 체험 신앙과 경건을 위해서라면 교회 통제를 벗어나더라도 어느 정도 그런 것을 관용해야 한다.’는 태도를 가졌다. 구파가 볼 때 신파는 비정통이었고 무지한 광신주의였으며 위험한 것이었다면, 신파가 볼 때에 구파는 죽은 정통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신파 중심인물 Gilbert Tennent가 1740년에 [변개하지 못한 목사의 위험]이라는 설교로 구파를 비판한 일을 계기로 표면화됐다. 그리고 1741년 구파가 신파를 축출함으로써 최초 분열을 겪게 됐다. 축출된 신파는 1745년에 신파 뉴욕 대회(New Side Synod of New York)를 결성했다. 또한 구파는 구파 필라델피아 대회(Old Side Synod Philadelphia)를 결성했다. 그런데 이 최초 분열은 대체로, 비록 약간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영국과 웨일즈 배경을 가진 관용적인 장로교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배경을 가진 엄격한 장로교 사이 분열이었다. 그런데 이 점은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지는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구파에게 축출된 신파도 채택 조례에서 합의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를 그대로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구파 마음에 드는 원칙들을 계속 지켜 나갔기 때문이다. 

통합 

비록 이들이 분열되긴 했지만 분열 시나 분열 이후에도 상호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이들은 1758년에 연합대회(New Side Synod of New York and Philadelphia)를 구성해 다시 통합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이 연합운동 주역이자 최초 회장을 맡은 인물은 바로 분열 원인이 됐던 Gilbert Tennent였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양 진영은 서로 자기들 주장을 조금씩 양보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공통 태도를 근거로 연합을 성취했다. 

그 뒤 1776년에 미국이 독립하자, 미국 장로교도 총회(General Assembly)를 조직했으며 내지선교內地宣敎에 더욱 힘을 쏟아서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교육을 위해 1811년에 Princeton신학교를 세웠고, 도덕적 고결성을 위해 금주, 도박 금지, 주일 성수를 강조했으며, 영화 관람과 댄스를 금지했다. 

그러나 이 기간 장로교 발전 중에서 2차 분열과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장로교가 많은 논란을 거친 뒤에 통합 계획(Plan of Union)에 따라 1801년에 뉴잉글랜드 조합 교회와 통합한 일이다. 이 통합은 선교지에서 조화와 화합을 유지하기 위해 이뤘다. 그리고 그 결과 신도들은 장로교회와 조합교회 어느 쪽에도 가입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바로 이 통합 때문에 뉴잉글랜드 신학이 장로교회에 스며들어 왔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돼 2차 분열이 일어나게 됐다. 

2차 분열: Old School / New School

통합 계획에 따라 장로교와 뉴잉글랜드 조합교회가 통합됐지만, 미국 장로교는 통합을 둘러싸고 보수파와 진보파로 나뉘어서 긴장과 갈등 가운데 들어가게 됐다. 당시 진보파는 ‘사무엘 홉킨스 추종자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홉킨스주의’와 이보다 더 급진적인 ‘나다니엘 테일러 New Haven 신학’이 양대 주류를 이루던 뉴잉글랜드 신학을 수용하고 있었다. 이 신학은 “죄인들에게 복음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고 그들이 구원받아야 할 필요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전적 타락 교리’와 ‘인간 힘에 의하지 않는 초자연의 중생 교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신학이었다. 이 주장이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 가르침에 벗어나는 것은 물론이었다. 

오랫동안 계속돼 오던 미국 장로교 이 긴장은 예일신학교에서 테일러에게 신학을 배운 Albert Barnes가 1829년 {구원의 길}이라는 설교집을 출판하면서 표면화됐다. 보수파는 그 설교 속에 나타난 죄인에게 하는 회개의 호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가르치는 칼빈주의 교리 체계에서 어긋난다는 까닭으로 1830년에 Albert Barnes를 총회에 고소했다. 그 뒤 진보파와 보수파는 총회에서 서로 엎치락뒤치락 하는 세력 다툼을 벌이다가, 마침내 1837년 보수파는 진보파를 축출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전체 교인 약 5/1에 이르는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다. 축출당한 진보파는 그해에 Auburn에 모여서 [어번 선언]을 채택해 자기네 입장도 정통 장로교 입장임을 천명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1838년 총회에 자기네 대표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보수파와 큰 소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들은 즉석에서 새로운 총회를 조직했다. 두 개의 장로교가 탄생한 것이다. 

이 당시에 오래 계속된 보수파와 진보파 싸움은 악명이 높았던 것 같다. 1835년에 찰스 피니는 총회를 비꼬면서 “해마다 총회가 모일 때쯤이면 지옥에서는 축제가 열릴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장로교인이었던 당시 잭슨 대통령은 “내 정적이 나를 괴롭히는 것은 장로교인들 분열이 내 속을 썩이는 것에 비하면 그 절반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분열 원인을 두고 후기 역사가들은 다양한 견해들을 제시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지배적인 견해는 그 분열의 주된 원인이 신학적인 것이었다는 견해이다. 보수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신학적, 교리적 순수성이었다면, 진보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 전파와 부흥이었다는 점이다. 

부흥을 지상 목표로 여기는 진보파에게서 부흥을 위한 어느 정도 신학적 타협을 두고 교회가 지나치게 엄격한 제재를 가하는 것이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바로 이런 부흥의 분위기 속에서 예일신학교가 1822년에 설립됐고, 또한 테일러주의의 온상지가 됐던 것이다. 그러나 진보파 이런 신학적 이탈은 결국 보수파 단호한 결단을 유도하게 됐다. 이들 단호한 태도는 당시 보수파 변증가였던 L. Cheeseman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몸의 소수가 불건전하게 되면 절단 이외 다른 치료책은 없다. 또한 다수가 불건전하게 되면 분리 이외 다른 치료책은 없다.” 결국 보수파는 자기네가 다수가 됐을 때에 전자前者 방법을 취했던 것이다. ‘보수파가 중시한 신학적 순수성’과 ‘부흥을 위해 더 관용적인 교회 통치, 신학적 관용주의를 주장한 진보파 태도’는 분열의 양면이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또 한 분쟁, 초교파 선교단체를 지원하는 문제에 대한 이견도 위 차이에 비춰서 쉽게 추리할 수 있다. 보수파는 “총회 산하 모든 교회는 총회 직접 통제를 받는 선교기관이나 교육기관과만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진보파는 “초교파 선교단체가 선교 효율성을 제고하며 교회연합에 도움을 준다.”는 까닭으로 초교파 선교단체를 더욱 지지했던 것이다. 

분열에서 세번째로 중요한 문제는, 당시 사회를 두고 교회가 취해야 할 도덕적인 태도였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 진보파는 “금주 운동이나 노예제도 폐지 같은 사회개혁 운동에 교회가 적극 참여하는 것이 성경적이다.”고 주장한 반면, 보수파는 “성경이 그런 문제를 놓고 직접적인 원칙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각 신자 양심의 자유에 맡기고 있으므로, 그런 문제를 놓고 교회는 결정적인 발언을 할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런데 미국 사회 큰 문제였던 노예제도를 두고는 미국 장로교는 또 다른 분열들을 감내해야 했다. 노예제도 폐지론 쪽으로 향하는 진보파에 반대해 1857년에 21 개 남부 노회는 진보파를 탈퇴해 장로교 연합대회(the United Synod of the Presbyterian Church)를 구성했다. 보수파도 역시 노예제도 문제로 분열을 감수해야 했다. 남북전쟁이 일어난 1861년에 보수파 1/3을 차지하던 남부 교회가 보수파를 탈퇴해 미국 연방 장로교(Presbyterian Church in 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진보파와 보수파에서 각각 탈퇴한 이 두 교회는 연합해 ‘남장로교(Southern Presbyterian Church)’로 알려진 미국 장로교(Presbyterian Church in United States)를 구성한다.

2차 통합 

1837년에 분열했던 교회는 1869년에 재통합을 성취한다. 그러나 이 재통합을 두고 당연히 갖게 되는 의문은 ‘1837년 분열 뒤 32 년이 지난 뒤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생겼기에 그들이 재통합을 성취할 수 있었느냐?’다. 물론 한 세대가 지나가는 동안 양 교단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 교단 구성원들 변화, 상대방을 향한 감정 변화 따위가 재통합에 어느 정도 긍정의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분열 당시 신학적인 이슈들은 어떻게 됐는가? 보수파가 진보파 입장을 용납할 수 있을 만큼 관용적이 됐는가? 아니면, 진보파가 신학적 관용주의를 버리고 원래 장로교 신학과 신앙을 취했는가? 아니면, 그런 신학적인 차이가 해결됨이 없이 어정쩡하게 조직적인 통합만을 이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묘하게도 재통합을 찬성했던 양 진영 대다수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재통합을 반대했던 소수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마지막까지 통합을 반대했던 소수의 보수파 대표자인 찰스 핫지는 다음과 같은 음미해 볼 만한 지적을 했다. “비록 진보파가 연합을 위해 자기네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인다고 공언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인다는 말을 두고 그들 이해에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과거 분열 당시에도 진보파들은 칼빈주의 체계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자기네는 여전히 그 체계를 받아들인다고 말했으며, 또한 실제로는 그 체계에서 명확히 벗어난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분열한 까닭은 진보파가 칼빈주의 체계를 공개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네 공언과 일관성 있게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연합을 이루려는 이 시점에서도 진보파는 칼빈주의 체계에서 벗어난 사상을 정죄하지 않고 그대로 묵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보파와 신학적 태도는 분열 당시와 달라진 것이 없으므로 재통합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 핫지 주장이었다. 

실제로, 보수파는 1850년대 말 부흥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양적으로 팽창했으며, 진보파 사람들은 보수파와 연합해 더 큰 교회 일원이 됐었다. 이처럼 진보파와 보수파가 통합을 이룰 당시 보수파는 분열 시 보수파 성격을 많이 상실한 상태였고, 진보파는 분열 시보다는 더 보수파에 가까이 갔던 것이다. 결국, 재통합을 이룬 교회는 진보파와 보수파 성격을 다 포함할 수 있을 만큼 그 조망이 확대됐던 것이다. 

중간평가 

지금까지 우리는 두 번에 걸친 미국 장로교회 분열과 통합 과정을 살펴보면서 장로교에 존재하는 두 가지 서로 상이한 신학적 전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하나는 ‘구파’와 ‘보수파’로 대표되는 전통이다. 다른 하나는 ‘신파’와 ‘진보파’로 대표되는 전통이다. 

전자는 대륙의 정통 개혁 교회,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계통 신앙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리고 후자는 영국 청교도와 뉴잉글랜드 청교도 전통을 따르고 있다. 전자는 ‘성경의 권위’를 두고 엄격한 견해를 강조하고, 객관적이고 권위적인 장로교 전통을 취하며, 부흥주의에 대해 회의적이고, 과도한 체험주의 기독교를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또한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에 성경의 권위를 구체적으로 적용해 교회가 권위적인 발언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긴다. 반면에 후자는 주관적이며 부흥주의를 중요히 여기고, 성경이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에 대해 어떤 결정적인 발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장로교 운영 원리는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을 위한 것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평가는 두 가지 신학적 차이점을 명확하게 부각하려고 대표 경향을 소개한 것이지, 그 각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동일한 강도로 어느 한 경향을 취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차라리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스펙트럼을 상상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좀 더 왼쪽으로 치우쳐 있고, 어떤 사람들은 좀 더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19세기 진보파는 18세기 신파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신파도 조금 더 왼쪽에 위치했고, 오히려 보수파가 신파의 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국 장로교는 두 번 분열과 통합을 거치면서, 점점 더 ‘신파’와 ‘진보파’ 쪽으로 기울어 왔던 것이다. 

미국 장로교회 발전 

2차 통합 뒤 미국 장로교회는 국내 선교와 외국 선교, 그리고 기독교 교육과 사회를 개혁하는 일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했으며, 그 결과 교회는 더욱 성장했다. 이런 성장과 함께보다 능률화 되고 중앙 집중적인 된 교회 조직이 탄생했는데, 문제는 이 교회 조직이 자유주의 신학자들ㅡ당시에는 이들을 “modernist”로 불렀다ㅡ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한 이들 모더니스트들은 처음부터 전통적인 칼빈주의 신학을 공공연히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재해석하면서 “우리들 신학적 사고가 참된 의미로 ‘기독교’다.”고 주장했으며, “오늘날 과학이 발달된 시대 속에서 기독교는 현대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말로 표현돼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들은 실제로는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고 신앙고백서와 함께 성경이 가르치는바 근본 가르침을 무시하며 교회의 연합을 위해 온갖 종류의 가르침을 다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런 자유주의적인 견해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 정통주의자들이 바로 근본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장로교 신학과 칼빈주의 체계를 그대로 고수했으며, 특히 성경의 권위와 영감의 문제에서는 지극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왜냐하면 결국 문제는 과연 성경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느냐 여부에 달려 있는 까닭이다. 이들 고발에 의해, 당시 장로교 내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자였던 Charles A. Briggs가 1893년에 총회에서 정죄당해 충분한 회개의 증거가 보일 때까지 목사 활동을 정지당했으며ㅡ그러나 뉴욕노회에서는 그의 무죄를 선언했다ㅡ 1894년에는 Lane신학교 Henry P. Smith가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까닭으로 교수 자격이 정지됐다.

그리고 1900년에는 동일한 까닭으로 유니온신학교의 A. C. MeGiffert가 면직 당했다.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기독교 신학의 한 형태가 아닌 이단 사상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근본주의라는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은 기독교의 사활이 걸린 근본 원리를 그들이 주장했기 때문이다. 근본주의자들이 총회를 지배하게 됐던 1910년의 미국 장로교 총회는 기독교의 다른 중요한 원리들과 함께 다음의 다섯 원리들을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것’으로 제시했다.: ①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②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③ 하나님 공의를 만족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대속. ④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 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의 초자연 성격. 

이리해 다시 이 시기 미국 장로교에서는 두 진영 대립이 전개됐다. 그러나 이 시기의 투쟁은 이전 시대 구파와 신파, 진보파와 보수파의 분열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전 시대 분열은 적어도 같은 복음적 신앙 내에서 어느 쪽이 더 성경적이고 어느 쪽이 더 정통적이었느냐 하는 것이었지만, 이 시기 분열은 기독교와 기독교 아닌 것 사이의 분열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립해 일어난 근본주의 진영 인물들은 여러 가지 신학적인 배경에 속할 수 있었다. 이전 같으면 서로 의견을 다르게 해서 제 길을 갔을 사람들이 공동의 적 앞에서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대주의도 당시 근본주의 진영에 가담해서 함께 싸웠다. 이 때문에 근본주의 성격은 상당히 모호해졌다. 따라서 근본주의는 특별히 칼빈주의적이거나 장로교적인 여러 가지 중요한 원리를 전혀 강조하지 않게 됐다. 환언하면 이 시대 칼빈주의적인 장로교인들은 기독교 뿌리를 공격하는 자유주의 공격 앞에서 기독교 자체 사활을 건 싸움을 해야 했으므로 칼빈주의나 장로교 신앙의 독특성 같은 문제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까닭으로 장로교 내 근본주의 운동이 거의 초교파적, 혹은 심지어 반교파적 성격까지 지니게 됐던 것이다. 

참고 도서 

1) George P. Hutchinson {The History Behind the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Evangelical Synod}(Mack Publishing, Company,1974). 본고는 이 책의 4, 5, 6장을 요약 

2) George M. Marsden {The Evangelical Mind and the New School Presbyterian Experience}(Yale University Press, 1970). 

3) Ned B. Stonehouse {J. Gresham Machen](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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