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축제 (The Feast of Fools)” - 예장뉴스
예장뉴스
생각 나누기나는 설교다
“바보들의 축제 (The Feast of Fools)”종려 주일(Palm Sunday)·사순절(Lent) 여섯 째 주일
예장뉴스 보도부  |  webmaster@pck-good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5.03.29  08:19:12
트위터 페이스북

종려주일 설교, “바보들의 축제 (The Feast of Fools)”

구약의 말씀: 스가랴 9:9-10 / 신약의 말씀: 마태복음 21:1-11
하은규 목사(시냇가에심은나무교회)

   
 

[서론] 종려주일(Palm Sunday): 메시아적 평화의 증언

(1) “내가 에브라임(평양)에서 병거(핵무기와 미사일)를 없애고, 예루살렘(서울)에서 군마(모든 무기와 전쟁 장비)를 없애며, 전쟁할 때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온 세상)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리심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강(한강)에서 땅 끝 까지 이를 것이다.”(스가랴 9:10)

(2) 오늘 주일은 고난 주간(Holy Week)이 시작하는 종려주일(Palm Sunday)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入城)하실 때, 무리들이 앞서고 뒤서며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며,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메시아, 왕으로서 입성하는 것으로 축제를 벌이며 예언자 스가랴가 그의 비전 가운데서 본 온 세상에 이루어질 메시아적 평화의 현실을 고대하며, “호산나!”(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하고 외치고, 환호하며 절규한 것을 기리는 주일입니다. 그로부터 200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이 부활주일을 기다리며, 함께 모여서 구약성서 스가랴 9장 9-10절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삶에 일어난 한 사건을 기리는 - 종려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닐까요?

[1] “바보들의 축제”(The Feast of Fools)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그때의 역사로 돌아가서 우리 모두 한번 그때의 정황을 상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호산나!”라고 외치는 무리 가운데는 대제사장, 사두개인, 서기관, 바리새인, 율법사들과 같은 종교의 권력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호산나!”라고 외치는 무리 가운데는 헤롯 당파와 산헤드린(Sanhedrin: 당시 최고 의결 기구인 70인 의회)의 의원들과 같은 정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호산나!”라고 외치는 무리는 권력도, 재산도, 지위도, 명예도, 그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어중이떠중이 들이었습니다.

(2)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다. 그는 권력도, 재산도, 지위도, 명예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30대 초반의 청년으로서, 나귀를 타고 마치 왕인 것처럼 예루살렘으로 어중이떠중이 민중들의 환호와 절규를 앞뒤로 하고 입성하고 계십니다. 로마의 황제와 장군들은 백마를 타고, 휘황찬란하게 장식을 한 군병들을 앞뒤로 하고, 양탄자를 밟고, 보무당당하게 행진하는데, 예수님이 타신 나귀의 발아래는 민중들이 깔아놓은 때와 냄새에 절은 겉옷들만이 널려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높은 자리에서 정치적, 종교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내려다본다면 그야말로 “바보들의 축제”의 모습일 것입니다.

(3) 유럽의 중세 때에 “바보들의 축제”(The Feast of Fools)라는 요란스러운 축제와 행진이 있었다고 합니다. 억압을 받던 민중들이 지배 계층의 권력자들과 종교 지도자들, 심지어는 교황과 주교, 감독들을 풍자해서, 이상스러운 옷들과 가면을 쓰고 조롱함으로써, 자신들을 억누르는 억압과 착취의 일상성으로부터 해방을 체험하는 행사였습니다.   이런 “바보들의 축제”가 종교개혁 시대를 즈음하여 사라짐으로써 전제 군주의 등장과 독재가 시작되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4) 우리나라에서도 안동의 하회(河回) 마을에 보존되어 있는 “탈춤”을 통하여 양반과 부자들을 조롱하고, 희화화함으로, 그들의 삶을 억누르던 정치, 경제, 사회의 부조리로부터 해방을 체험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탈춤은“바보들의 축제”의 바로 한국판(版)의 모습일 것입니다.

(5) 유럽의 “바보들의 축제”나 우리나라의 “탈춤”의 뿌리가 바로 우리가 오늘 드리는 종려주일의 사건에 있습니다. 종려주일의 사건 한가운데는 어떤 예기하는 미래로부터 오는 근원적 현실이, 억압의 일상성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재의 현실에 가져다주는 “선취(先取)하는 해방”(a proleptic liberation)의 힘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 해방과 자유와 구원의 힘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종려주일의 사건 한가운데는 예수가 종말론적으로 가져다주실 구원이 현재화 되고, 그 구원을 무리들이 “호산나! ―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절규하며 갈구하고 있습니다.

[2]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

(1) 흔히 인간을 “도구를 쓰는 인간”(homo fabre)라고 말하고, 또는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도구를 이용함으로써 노동하며, 문명을 건설합니다. 마르크스(Marx)는 노동(Work)의 신성을 가르치고, 노동하는 인간의 생산을 통해 얻어지는 부(富)의 공정한 분배를 통한 노동으로부터 소외가 없는 사회정의를 강조했습니다.  루터(Luther)와 칼빈(Calvin) 같은 개혁자들은 노동을 통한 근면을 강조함으로써 자본의 축적을 통한 자본주의의 사회를 가져오게 했고, 자본주의의 청교도적 윤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은 아퀴나스(Aquinas)나 데카르트(Descartes)를 통해 사유(思惟)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 신학과 철학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2) “도구를 쓰는 인간”(homo fabre)이나 “생각하는 인간”(home sapiens)을 넘어 현대에 와서 후이징가(Johan Huizinga)는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이란 책을 통해, 노동과 사유 못지않게 유희(遊戱)가 인간의 한 중요한 본질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인간은 놀이(play)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을 실현해 갑니다.

(3) 하버드 대학의 신학자인 콕스(Harvey Cox)는 “놀이하는 인간”(home ludens)을 더 풀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놀이하는 인간”은 “축제를 즐기는 인간”(homo festivus)이고, “환상(몽상, 꿈)을 가진 인간”(homo fantasia)입니다. 축제는 과거를 기억(memory)하는 일입니다. 어느 사회나 국가의 공휴일(축제)은 과거에 일어난 그 날과 관련된 사건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가령 광복절과 같은 공휴일(축제)은 과거, 나라의 주권을 잃고, 독립을 되찾은 사건을 기억함으로써 다시는 주권을 잃고, 다른 나라에 예속되는 과거의 수치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미래를 다짐하는 현재의 축제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축제를 즐기는 인간”(homo festivus)의 단면입니다. 그날에 불꽃을 쏘아올리고, 파티를 엽니다.   환상(몽상, 꿈)은 미래를 기대(anticipation)하는 일입니다. 어느 개인이나 단체, 사회와 국가도 미래의 꿈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보다 나은 미래를 기다리는 환상은 현재의 그 어떤 고난도 견뎌낼 수 있게 해주는 힘을 줍니다. 미래의 빛에서 현재를 변화시킵니다. 바로 이런 면이 “환상(몽상, 꿈)을 가진 인간”(homo fantasia)의 모습입니다.

[3] 궁극적(최고의) 현실에의 참여(Participation in Supreme Realism)

(1) 종려주일의 사건은 바로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의 모습입니다. “축제를 즐기는 인간”(homo festivus)과 “환상(몽상, 꿈)을 가진 인간”(homo fantasia)의 모습이 거기에 용해(溶解)되어 있습니다.   그 자신이 시간과 역사의 거리를 극복한 예수가 현재와 미래를 새롭게 규정하며 예언자 스가랴가 꿈꾼 메시아의 평화의 궁극적 현실(the supreme Reality)을 그의 행동(나귀를 타고 왕으로 입성하시는) 속에 현실화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모든 불의와 전쟁과 갈등 나아가서 궁극적으로 죄와 죽음의 힘을 이기신 왕으로 군림하고 계십니다. ―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종려주일의 사건은 성서의 문자(文字)로서만 박혀 죽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종려주일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한가운데 그 메시아적 평화가 현재의 사건으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2) 위대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Karl Barth)는 그의 기념비적 대작(masterpiece)인 교회 교의학 (Church Dogmatics)의 “화해론” 가운데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를 말해줍니다.  바르트가 “화해론”을 쓸 때로부터 백여 년 전에 그의 고향 스위스 바젤(Basel)의 어느 교회의 부목사로 있던 아벨 부크하르트(Abel Burckhardt)는 독일어의 바젤 사투리로 어린이 찬송가를 작곡도 하고 편찬도 했습니다. 그 찬송가들의 가사 속에 크리스마스와 종려주일(Palm Sunday), 성금요일(Good Friday), 부활절(Easter), 승천절(Ascension Day), 성령강림절(Pentecost) 등등, 교회력에 따른 절기(節期, 축제) 때마다 그가 지은 찬송가를 부르면 마치 크리스마스와 종려주일, 성금요일, 부활절 등의 사건이, 자기가 살아가는 바젤에 아주 중요한 일로 다시 일어나는 것 같은 현실감을 느꼈다고 하면서, 어릴 때 아벨 부크하르트 목사의 찬송을 통해 신학의 씨앗이 그의 마음에 싹트기 시작해서, 그에게 헌사(tribute)를 드린다고 적으면서, 바로 크리스챤의 삶은 예수의 사건 속에 일어난 “궁극적(최고의) 현실에 참여”(participation in supreme realism)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3) 우리들은 바로 이와 비슷한 체험을 적어도 크리스마스의 어린이들이 펼치는 연극(play) 속에 느낍니다. 어린이들은 성탄극 속에서 목동도 되고, 천사도 되며, 요셉도 되고, 마리아도 되어 아기 예수의 둘레에 모여듭니다. 최소한 그때에, 그 성극(聖劇)에 참여한 모든 어린이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실은 모두 잊어버리고, 일상성의 삶에서 벗어나, 예수의 탄생의 궁극적 현실에 참여합니다. 자기의 존재도 없어지고, 세상의 현실도 없어지고, 예수의 현실에만 그들은 참여합니다. 종려주일 예배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왕으로 오시는 예수의 궁극적 평화의 현실에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모두 내버리고, 예수가 다스리는 그 평화와 구원의 현실에 환호하고, 소리 지르며 참여하는 예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결론] 메시아적 평화의 증언과“선취(先取)된 해방”(a proleptic liberation)의 현실을 누리며···

(1) 종려 주일 예배는 이미 과거에 일어난 사건으로 성서에 문자화(文字化)되고 고착(固着)되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가 왕이 되어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환호하며 종려가지를 뒤흔드는 그 무리의 일원이 되어, 우리는 함께 “호산나!”라고 외치고 절규해야 합니다.“호산나!”는 찬양의 노래가 아닙니다.“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탄식의 절규입니다. 그리하여 메시아가 주시는 평화와“선취된 해방”의 현실을 누려야 합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2) 우리는 우리의 실존의 모든 억압으로부터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쳐야 합니다. 열등의식과 인정받지 못한다는 원망과 비난, 그 밑바닥에 놓여 있는 죄의 현실과 죽음의 힘으로부터 “선취된 해방”을 누려야 합니다.-“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3)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든 현실로부터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호산나)!”라고 외쳐야 합니다. 거짓과 사악한 권력과, 돈(맘몬)이 지배하는 사회로부터, 성공의 신화가 다스리는 사회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사회, 하나님의 의와 나라가 이루어지는 사회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선취된 해방”의 현실을 실현해야 합니다. -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4) 우리가 놓여 있는 국내의 현실로부터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호산나)!”라고 외쳐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쿠테타로 집권한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과, 재벌과 대기업, 그리고 “조중동”이라 불리우는 보수언론들과, 이를 종교적으로 축복하고 정당화해 주는 대형교회들의 네 세력이 뭉친 공고한 “특권의 카르텔”은 점점 그 기득권의 특혜와 부를 더욱 확장하고 더욱 공고히 해 가고 있는 반면에, 정부의 정책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하고 있는,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는 젊은이들, 양산되어 가고 있는 비정규직 근로자들, 쌍용차 해고 근로자들을 위시한 지난 겨울 차디찬 아스팔트 위를 온몸으로 기어 가며 오체투지 저항을 벌인 기흥전자의 해고근로자들과 그밖의 일터를 빼앗긴 수 많은 근로자들과 그들이 극명히 드러내고 있는 빈부의 양극화 현상의 점증과, 이로 말미암아 짙게 드리우고 있는 ‘불안’과 ‘좌절’과 ‘절망’의 짙은 그림자일 것입니다. 국정원과 군대가 동원된 부정선거로 집권한 정부는 국민들의 물질적인 행복과 성공의 기대에 편승하여 물신주의(物神主義)의 가치관을 더욱 퍼뜨리며, 진실, 정직, 정의, 사랑과 같은 가치 보다, 돈과 성공의 가치는 더욱 힘을 얻어 가는 사회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불안과 공허의 마음을 그 누가, 그 무엇이 어루만져 고쳐 줄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가, 교회가 해야 만 하지만, 지금의 우리나라 교회에 기대할 수 가 있겠습니까?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되어 냉전의 구조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한반도에, 북한이 개발한 핵무기로 인한 위기와, 이에 대응하는 우리 정부의 무기 사재기와 싸드 등 미국 신 무기의 한반도 배치 논란은 그리스도의 평화와는 점점 더 멀어져 가는 현실을 만들어 가며 불안을 증폭해 가고 있습니다.

(5)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9장 9-10절은 선포하고 있습니다:“내가 에브라임(평양)에서 병거(핵무기와 미사일)를 없애고, 예루살렘(서울)에서 군마(모든 무기와 전쟁 장비)를 없애며, 전쟁할 때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온 세상)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리심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한강) 강에서 땅 끝 까지 이를 것이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함으로서 가져다주신 메시아적 평화의“선취된 해방”의 현실을 우리들은 불안하기만 한 현실 한가운데에 증언하고 만들어 가야 합니다. 우리와 이 세계가 놓여있는 세계의 현실 한가운데서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호산나)!”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이루신 메시아의 평화의 증언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오늘 나귀를 타고 왕으로 오시는 예수가 그의 평화를 이룩하시도록 우리는“선취된 해방”의 현실을 이 세계의 현실 한 가운데서 증언해야 합니다. ―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6) 오늘은 고난주간이 시작하는 종려주일입니다. 나귀를 타고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入城)하고 있는 예수님 뒤에는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이 눈 아래로 깔고 보는, “어중이 떠중이처럼 보이는” 민초들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좋은 집과 아파트에 자동차를 굴리며 소시민적 행복을 구하고 누리는 중산층의 그리스도 교인이 아니라, 청와대 앞에서 그들의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애타는 마음을 들어 달라고 호소했지만 철저히 버림받고 외면 당한 “세월호” 가족들과, 일자리에서 해고 당해 절망 가운데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찬 겨울 굴뚝 위에서 추위와 싸우며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던 쌍용차 근로자들을 위시한 수 많은 해고 근로자들과 그 가족들, 좋은 혈연과 학벌과 배경이 없어서 알바로,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셀 수 없이 수 많은 사람들과 젊은이들이 나귀를 타고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뒤따르며, “호산나”-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신앙은 사적인 내 개인의 종교적 감정과 영성, 경건과 거룩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왕으로 오시고,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 “궁극적 현실”을 이루기 위해 나를 다 던져 그 예수의 현실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에게는 겟세마네와 골고다의 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예수를 따르다는 것은 예수의 겟세마네와 골고다의 길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당부하시지 않았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다”는 일은 우리나라 교회의 설교에서, 교인들의 삶에서 사라진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2015년의 종려주일 예배를 드리고자 모인 우리들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재 나의 삶과, 우리 교회의 삶과, 이 세계의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에 종려주일의 “축제”와 “환상”을 지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가 걸으신 “고난의 길”(via dolorossa)을 함께 걸음으로 이 고난 주간(Holy Week)을 교우 여러분들의 삶을 변하시키는 의미가 가득한 주간으로 맞으시고, 보내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하은규 목사님과 더 깊은 대화를 원하는 분들은 연락바랍니다. 
전화 02) 313-3201 / 휴대전화 010-9475-7127 / E-mail: unclehah@gmail.com

[관련기사]

예장뉴스 보도부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많이 본 기사
1
"한국교회 진단과 대안" 정성진 목사 초청 강연회
2
총회 산하 7개 신학대학교 교수 시국성명서 발표
3
이찬수 목사, 정말 아픈가?
4
“인성검사 통과 안 되면 목사 안수 못받는다”
5
102회 동성애 관련 총회 결정에 대한 긴급 제안서
6
김동호 목사 이미 은퇴한 목사아닌 가?
7
원주제일교회 성도들 주일 날 상경 시위
8
장신대 김철홍 교수 글에 대한 학생들 입장
9
명성교회 후임 청빙위원회 발표
10
개혁하는 교회 탐방(거룩한 빛 광성교회)
신문사소개후원하기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 성동구 성수동 성덕정 17길 10 A동 202호   |  전화 : 02-469-4402  |  행정 : ds2sgt@daum.net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 : 서울 아02054  |  발행인 · 편집인 : 유재무 |  대표 : 이명남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 진
Copyright © 2011 예장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pck-goodnews.com